
한국 고서(古書) 문화의 대부로 꼽히는 여승구 화봉문고 대표가 14일 별세했다. 사진은 2017년 4월 14일 인사동 화봉문고에서 중앙일보와 만났을 당시 모습.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한국 고서(古書) 문화의 대부로 꼽히는 여승구 화봉문고 대표가 14일 별세했다. 향년 86세.
학계 등에 따르면 고인은 이날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고서를 10만여 권 수집하는 등 국내 대표 장서가로 유명했던 여 대표는 한국 출판문화를 알리고 보존하려 노력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고인은 1955년 고교 졸업 후 상경해 한 헌책방에서 일한 것을 계기로 고서적에 눈을 떴다. 중고생 시절부터 시인을 꿈꾸기도 했던 고인은 이후 중앙대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했지만, 생계를 위해 중퇴한 이후 1963년 서적 무역업에 뛰어들었다. ‘팬아메리칸 서비스’라 이름 붙인 자신의 사업을 통해 여 대표는 각종 해외 학술지나 외국서적, 유명 일간지 등을 수입·판매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처음 국내로 들여온 것도 그였다. 이후 서린동에서 국내 서적을 판매하는 서점으로 회사를 확장한 고인은 1975년 ‘월간 독서’를 발행한 것을 시작으로 출판업도 겸하게 됐다.

여승구 화봉문고 대표는 2017년 4월 14일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고서 수집은) 블랙홀 같아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어렵다. 나도 젊음을 몽땅 바쳤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1982년 국내 최초로 국제 규모의 도서박람회인 ‘서울 북페어’를 개최한 것이 그의 인생에 변곡점이 됐다. 당시 행사에 전시한 뒤 경매에 부칠 생각으로 『님의 침묵』 등 한국문학 초판본 200여 권을 모았으나, 파는 대신 책 박물관을 세워보겠노라 마음먹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고서 수집의 길에 들어섰다. 이후 1987년 한국고서학회를 설립하고 고서 경매전을 개최하는 등 고서 대중화에 앞장섰다.
고인은 2017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고서 수집에 대해 “블랙홀 같다.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어렵다”며 “애첩을 팔아 귀중본을 구했다는 중국 고사가 있을 정도다. 나도 젊음을 몽땅 바쳤다”고 회고했다. 그는 『춘향전』 판본만 600여종 가량 수집했고, 『천로역정』의 영국·중국·한국 초판본도 모았다. 생전 여러 인터뷰에서 자신의 소장품 중 가장 아끼는 고서로는 고려시대 역사서인 『삼국유사』『삼국사기』『제왕운기』를 꼽았다.
한국 출판문화가 사라져가는 것을 안타까워 한 그는 “구텐베르크 이전에 나온 금속활자본이 한국에 수천 권 남아 있는데 가치를 모른다. ‘코리안 브랜드’를 알릴 최고의 한류 상품인데 울화통이 터진다”(본지 2017년 인터뷰)고 털어놓기도 했다. 고활자본 수집에도 많은 돈을 들였다는 고인은 ‘남은 인생의 바람’을 묻는 질문에 “한문 세대가 사라지고 있지만, 고활자본은 변치 않는 유산”이라며 “한국 문화의 진수가 세계의 공인을 받도록 후배들이 더욱 뛰어야 할 때”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