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 피해, 정부가 배상해야"…첫 판결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피해 생존자인 응우옌 티탄 씨가 7일 서울 서초구 중앙지법에서 열린 국가 배상 소송 1심 선고가 끝난 뒤 권현우 한베평화재단 사무처장과 대화하며 미소 짓고 있다. 뉴스1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피해 생존자인 응우옌 티탄 씨가 7일 서울 서초구 중앙지법에서 열린 국가 배상 소송 1심 선고가 끝난 뒤 권현우 한베평화재단 사무처장과 대화하며 미소 짓고 있다. 뉴스1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 피해에 대해 정부가 배상해야 한다는 첫 판결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법 민사68단독 박진수 부장판사는 7일 ‘퐁니 마을 민간인 학살 사건’ 생존자인 베트남 국적 응우옌 티탄(63) 씨가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

응우옌 티탄 씨는 7살이던 1968년 2월 한국군이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현 퐁니 마을을 공격해 5명의 가족을 잃었고, 자신도 배에 총상을 입었다고 주장하며 2020년 4월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당시 마을에서는 노인과 어린이 등 70여명의 민간인이 숨졌다고 한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해 베트남인 피해자가 한국 정부 책임을 물으며 소송을 낸 것은 응우옌 티탄 씨가 처음이다.

퐁니 마을 학살 사건을 공식 인정하지 않고 있는 우리 정부는 재판 과정에서 사실관계를 두고 첨예하게 다퉜다. 정부는 ▶한국군으로 위장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군인(베트콩)들이 벌인 일이라거나 ▶만에 하나 한국군이 민간인 학살 사건에 연루됐다 해도 게릴라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총상을 입었다는 응우옌 티탄 씨의 진술이 왜곡됐을 가능성도 제기했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당시 한국군이 퐁니 마을에서 민간인을 학살한 것이 입증된다고 봤다. 직접 법정에 나온 목격자나 참전 군인의 증언에 신빙성이 있다고 인정한 것이다. 당시 남베트남 민병대 소속이었던 응우옌 득쩌이(83)씨는 지난해 8월 법정에 나와 “주민들이 모여 있다가 군인들에게 총살됐다”며 자신이 시신 더미를 발견한 지점들을 지도에서 짚어가며 설명하기도 했다. 

참전군인 류진성씨 역시 증인으로 출석해 “다른 소대원들이 민간인을 죽인 현장이나 장면에 대해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이야기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재판부는 “명백한 불법 행위”라며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베트남전 당시 전시 강간 등을 저질러 군사 재판을 받은 군인들에 대해 법원이 개별적으로 민간인 학살 사실을 인정한 판례는 있었으나, 퐁니 사건처럼 집단으로 자행된 민간인 학살을 법원이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퐁니 사건의 목격자인 응우옌득쩌이(왼쪽)씨와 피해자 응우옌티탄씨가 2022년 8월 국가 배상 소송 사건 변론 기일에 직접 출석했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이 우리 법정에 직접 출석해 증언한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베트남전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시민네트워크 제공

퐁니 사건의 목격자인 응우옌득쩌이(왼쪽)씨와 피해자 응우옌티탄씨가 2022년 8월 국가 배상 소송 사건 변론 기일에 직접 출석했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이 우리 법정에 직접 출석해 증언한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베트남전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시민네트워크 제공

재판부는 소송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정부 주장도 모두 기각했다. 정부는 “한국과 월남 사이 체결된 군사 실무 약정서 등에 따라 민간인 관련 사고의 소청 절차가 당시 이미 완료됐고, 베트남인이 대한민국 법원에 직접 소송을 내는 것은 적법하지 않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군사 당국 사이 실무약정은 기관 간 합의에 불과하다”며 응우옌 티탄 씨의 재판청구권을 인정했고, 국가배상법이 요구하고 있는 ‘베트남과 대한민국 간의 상호보증’ 역시 인정했다. 베트남 민법과 헌법 등에 따라 대한민국 국민이 베트남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만큼, 응우옌 티탄씨 역시 대한민국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게 된다.  

응우옌 티탄 씨가 피해를 본 뒤 52년이 지난 뒤 소송을 내 소멸시효도 쟁점이 됐지만, 재판부는 소멸시효가 아직 지나지 않았다고 봤다. 정부가 학살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데다 양국의 진상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라, 응우옌 티탄 씨가 자신의 권리를 제때 행사할 수 없었던 점을 인정한 것이다. 대법원은 “집단으로 개인의 기본권을 침해한 뒤 진상 규명 노력도 다하지 않은 국가기관이 배상을 청구하는 피해자들에게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권리 남용”이라는 판례를 두고 있다.  

이날 재판부는 원고들의 청구액 3000만100원보다 더 많은 4000만원의 위자료를 인정했다. 인권침해의 불법성, 원고의 나이, 피해 내용과 정도, 배상이 지연된 시간 등을 고려하면 위자료를 증액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다만 민사소송 특성상 응우옌 티탄 씨는 당초 청구한 금액에 지연 이자를 더한 금액만 배상받을 수 있다.

베트남에서 선고 결과를 기다리던 응우옌 티탄 씨는 이날 화상으로 기자회견에 참석해 “퐁니 사건으로 희생된 74명의 영혼들에 위로가 될 것”이라며 재판부에 감사를 전했다. 응우옌 티탄씨를 대리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의 박진석 변호사는 “이 사건 판결문은 대한민국의 사법부를 통해 비로소 베트남 학살 피해자들에게 보내는 공식적인 위로와 사과문”이라며 의미를 부여했다. 

법조계에서는 이번 판결로 유족들의 추가 소송이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지만, 대리인단은 “다른 당사자들의 의사를 파악해야 할 단계”라며 말을 아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