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TB코인 사기 피해자 강영준(가명·사망)씨가 지난해 1월 경찰에 제출한 피해 진술서. 강씨는 “(FTB 측은)이 투자가 잘못 되었을 때 H 법률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1만개의 비트코인으로 투자 손실을 보상해 주겠다며 코인 투자를 권유했다”고 썼다. 피해자 측 제공
강영준(가명, 사망 당시 50세)씨에게 2020년 FTB그룹 대표 이모씨가 접근해왔다. 이씨는 “손실을 만회할 기회”라며 자신이 발행한 FTB(Free Tool Box) 코인에 투자하라고 꼬드겼다. 강씨는 이미 2017년 비트코인 채굴기에 투자하면 수익을 안겨준다는 비트클럽네트워크 다단계 사기에 속아 수억원을 날린 상태였다. 의심하는 강씨에게 이씨가 보여준 게 바로 ‘비트코인 1만개’(2020년 6월 기준 1312억원)였다. FTB 코인의 가치가 떨어지더라도 예치된 비트코인 1만개로 원금을 보상해 줄 수 있다는 FTB 측 설명이 강씨에겐 믿음의 지렛대가 됐다. FTB 이사 탁모(44)씨가 보여준 전자지갑 화면 속 ‘10,000’이란 숫자, 변호사 공증까지 받은 위탁 보관 계약서에 강씨의 믿음은 확신이 됐다.

FTB그룹 이사 탁모(44)씨는 2020년 6월 투자자들에게 전자지갑의 비트코인 1만개를 인증했다. 그는 투자자들에게 ‘교주’로 불렸다. 피해자 측 제공
그러나 강씨는 한 푼의 수익금도 손에 쥐지 못했다. 2020년 8월 군소 거래소인 프로비트에 상장된 FTB코인은 락업(Lock-up·동결)이 걸려 회수 불가 상태에 빠졌다. “왜 수익이 나지 않느냐”고 따져도 “곧 상장되니 기다리라”는 말만 돌아왔다. 강씨를 따라 2억원을 투자한 유족 A씨는 “지금 생각해 보면 미친 사람 같겠지만, 비트코인 1만개가 찍힌 전자지갑을 보는 순간 이성이 마비돼 버렸다. 탁씨는 당시 교주나 다름없었다”고 말했다. 10개월을 참고 기다렸지만, 원금을 돌려준다던 약속도 희미해졌다. FTB 사무실을 박차고 나온 게 2021년 4월, 그로부터 두 달 뒤 FTB코인은 휴지조각이 됐다.

FTB 코인 발행사는 2020년 6월 한 법률사무소와 탁씨 소유의 비트코인 1만개에 대한 위탁보관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비트코인은 다른 사람의 소유였다. 피해자 측 제공
강씨는 결국 지인이 주도하는 피해자 공동 대응에 참여해 탁씨를 고소했다.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 참고인 조사를 앞두고 있던 지난해 10월 어느 날 그는 지인 B씨와 통화하면서 “너무 힘들어서 그냥 죽고 싶다”고 토로했다. “죽을 용기가 있으면 법으로 해결해 보자”고 달래는 B씨의 말에 마음을 다잡았지만, 경찰에 출석하기로 한 10월 21일 강씨는 자신의 방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시신 옆에는 비어있는 1.5ℓ짜리 페트 소주 2병이 놓여 있었다. 의사의 소견은 내인성 심장마비였지만, 유족이 부검을 원하지 않아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새벽에 숨진 강씨를 정오 무렵 발견한 건 강씨가 큰돈을 벌어 행복하게 해 주겠다던 노모였다.

강영준(가명)씨는 2020년 7월부터 9개월 동안 FTB 사무실에서 숙식하며 코인 트레이딩을 배웠다. 하지만 수익은 없었고 빚만 쌓여갔다. 피해자 측 제공
경찰은 지난 2월 탁씨에게 사기 혐의가 있다고 보고 사건을 서울중앙지검에 송치했다. 현재까지 드러난 FTB코인 투자자들의 피해액은 391억원. 탁씨는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투자자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했다. 돈을 더 받아내려는 투자자들이 이씨의 죽음을 내 탓으로 돌리며 협박하고 있다. 비트코인 1만개도 분명히 사용할 수 없는 코인이라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피해자 대리인 정용기 변호사(법무법인 대건)는 “‘사용할 수 없다’는 말은 스테이킹을 중도 해지하면 보상으로 받는 코인이 적어진다는 취지일 뿐 피해자들은 비트코인 1만개로 손실을 보상받을 수 있다고 기대했다. 애당초 비트코인 1만개 자체가 없었다”고 반박했다.

FTB그룹은 백서를 통해 2022년까지 바이낸스 등 해외 대형 암호화폐거래소에 FTB코인을 상장하겠다고 했으나 지켜지지 않았다. 백서 캡처
코인 사기 의혹이 잔혹한 살인으로 비화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서울 강남구 납치·살인 사건의 발단이 된 퓨리에버코인 얘기다. 유니네트워크 이모(59) 대표가 만든 이 코인은 프라이빗세일 뒤 브로커에게 뒷돈을 주고 국내 대형 거래소에 상장, 시세조종(MM)으로 가격을 올려 물량을 털어내는 방식으로 투자자들에게 피해를 줬다. 피해자들이 원금을 돌려달라고 항의하자 초기 투자자 사이 책임 공방이 일었고, 결국 고소전을 벌이던 양측의 갈등이 청부살인으로 이어졌다.

서울 강남구 납치·살인 사건 배후로 지목된 유상원(51·左), 황은희(49·右) 부부는 퓨리에버코인 시세조종 등으로 갈등을 빚은 다른 초기 투자자에 대해 살인을 교사한 혐의를 받고 있다. 뉴시스

지난달 발생한 서울 강남구 납치·살인 사건의 발단은 퓨리에버코인 사기 의혹과 관련한 초기 투자자 사이 소송전이었다. 사진은 퓨리에버코인 발행사 유니네트워크 이모(59) 대표가 2019년 7월 4일 퓨리에버 전국영업 대표자 출범식에서 발언하는 모습. 유튜브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