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우 이순재가 연극 '리어왕'에서 모든 것을 잃고 실성한 왕을 연기하고 있다. 사진 연우무대·에이티알
모든 것을 잃은 리어왕은 막내딸 코딜리아를 끌어안고 이렇게 절규한다. 혼이 나간 리어왕의 목소리는 현실이 믿기지 않는 듯 건조했지만, 눈빛은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거두어 달라 외치는 듯 절절했다. 지난 2일 배우 이순재(88)가 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에서 선보인 연극 '리어왕'은 그의 66년 연기 인생을 응축한 듯 인간의 희로애락을 고루 담고 있었다.
연극은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최고의 수작으로 꼽히는 '리어왕'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기원전 8세기 고대 브리튼 왕국이 배경이다. 절대 권력을 가진 왕이 두 딸의 아첨에 넘어가 모든 것을 뺏기고 미쳐가는 과정을 담았다. 권력, 욕심, 배신, 욕정 등 인간의 본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다양한 인간군상이 등장한다. 이순재 주연의 '리어왕'은 2021년 서울 예술의전당 공연에 이어 두 번째다.
이날 공연은 개막 2일 차 프리뷰였음에도 이순재는 안정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그는 절대 군주에서 미치광이 노인으로 전락한 리어왕의 심리를 세밀하게 표현했다. 아들에게 속아 두 눈을 잃게 되는 글로스터 백작 역의 최종률, 사탕발림으로 리어왕의 유산을 차지하는 맏딸 고너릴 역의 권민중과 둘째딸 리건 역의 서송희 등 조연 배우들의 연기도 수준급이었다. 충신 켄트 백작 역의 박용수는 특유의 여유롭고 안정적인 발성으로 묵직한 존재감을 뽐냈다.

리어왕 포스터. 사진 연우무대·에이티알
살인적 대사량 소화한 이순재 "자다가도 튀어나오게 연습"
이번 공연은 셰익스피어 원작을 각색하거나 압축하지 않고 그대로 무대에 올렸다. 원작에서 나오는 모든 독백과 방백을 그대로 살리고, 가장 권위 있는 정전본으로 인정받는 셰익스피어 사후 7년 차(1623)에 만들어진 희곡집을 번역해 대본으로 썼다.
번역을 맡은 이현우 순천향대 영미학과 교수(셰익스피어학회장)는 "산문 위주인 기존 번역본과 달리 원작의 운문은 운문 그대로, 산문은 산문으로 구분해 번역했다"며 "운문을 번역할 때는 말의 맛을 살리기 위해 시의 기본이 되며 판소리에서도 흔히 사용되는 3, 4 음보 등을 활용했다"고 했다.

배우 이순재가 리어왕을 연기하고 있다. 사진 연우무대·에이티알
긴 독백을 속사포 같이 쏟아내며 몇 분간 쉼 없이 딸을 욕하는 리어왕의 정성스럽고도 문학적인 저주가 다소 코믹하게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공연이 끝나자 관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배우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박수를 보냈다.

배우 이순재가 리어왕을 연기하고 있다. 한때 브리튼왕국의 절대 군주였던 리어왕은 두 딸에게 속아 모든 것을 잃고 실성해 길을 떠도는 신세가 된다. 사진 연우무대·에이티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