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양이 돌봄’ 문제를 두고 곳곳에서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소중한 생명(동물권)”과 “주민 골칫덩이(생활권)”라는 입장차가 충돌하면서다. 이런 가운데 부산의 한 아파트 입주민들이 공청회 끝에 길고양이 급식소를 설치하기로 해 눈길을 끈다.
2일 부산동물사랑길고양이보호연대 등에 따르면 지난달 18일 부산 사하구 한 아파트 입주자 대표와 관리사무실 관계자, 캣맘(길고양이 돌봄 여성) 등 20명이 모여 주민공청회를 열었다. ‘길고양이 급식소 설치 여부’를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이 아파트에서는 캣맘과 캣대디가 단지 인근에 사는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걸 두고 수년간 입주민 간 갈등이 첨예했다. 반대주민은 개체 수가 늘어나 소음·분변 등으로 인한 생활 불편이 커질 것을 우려했다. 이 단지 주변엔 28마리 정도가 배회 중이라고 한다. 반면 길고양이 동물권을 보호해줘야 한단 주장도 만만치 않았다.
부산 사하구 한 아파트에 주민공청회 끝에 설치한 길고양이 급식소. 사진 부산동물사랑길고양이보호연대
공청회 초반에는 그동안 쌓인 감정으로 격론이 벌어져 논의가 무산될 뻔했다. 하지만 부산동물사랑길고양이보호연대 중재로 조율한 끝에 아파트 입주민들은 길고양이 급식소 3개를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주민이 잘 다니지 않는 지정된 장소(길고양이 급식소)에서만 먹이를 주되, 급식소 청소·사료 주기 등 캣맘·캣대디 3명이 길고양이 돌봄을 책임지겠단 조건이었다. 길고양이 개체 수 조절을 위한 중성화 수술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해 추가 민원이 발생하지 않도록 했다. 이처럼 주민들이 여론 수렴을 거쳐 길고양이 급식소를 공식 설치한 사례는 드물다.
부산 사하구 한 아파트에 주민공청회 끝에 설치한 길고양이 급식소. 사진 부산동물사랑길고양이보호연대
최근 경남 창원에서는 입주민 민원으로 철거됐던 길고양이 급식소가 입주민·지자체·동물보호단체·캣맘 등이 함께 논의한 끝에 재설치하기도 했다. 창원시길고양이협회에 따르면 지난 8월 말 마산합포구 한 아파트에 설치돼 있던 길고양이 급식소가 철거됐다. 이 아파트에 살던 30대 캣맘이 인근에 사는 길고양이 10마리를 위해 3년째 운영해오던 급식소였다. 하지만 한 입주민이 ‘아파트 안에 밥자리가 있으니 길고양이가 몰려드는 것 아니냐’고 불만을 제기하면서 치워졌다.
경남 창원 마산합포구 한 아파트에 철거 후 재설치한 길고양이 급식소. 사진 창원길고양이협회
이에 창원시와 창원시길고양이협회, 캣맘은 아파트 관리사무소와 민원 제기한 입주민과 대화에 나섰다. 급식소처럼 지정된 장소가 있어야 무분별한 먹이주기 행위를 줄여 청결하게 관리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또한 캣맘이 10마리 길고양이 중 약 70%를 중성화 수술할 수 있도록 하는 등 개체 수 조절에도 힘써왔단 점을 강조했다. 그 결과 지난달 중순 아파트 단지 내 입주민 왕래가 적은 2곳에 길고양이 급식소를 다시 설치할 수 있었다.
지방자치단체와 동물보호단체는 이처럼 길고양이 급식소가 마련돼야 길고양이 관련 주민 갈등이 줄어들 수 있다는 입장이다. 지정된 장소에 사료를 주면 길고양이들이 모여들어 중성화 수술(TNR)을 위한 포획이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이다. TNR은 길고양이를 포획(Trap)해 중성화(Neuter)한 뒤 제자리에 방사(Return)하는 사업으로, 고양이의 번식력을 낮춰 장기적으로 길고양이 수를 줄이는 게 골자다. 중성화 수술을 받은 고양이는 번식기 동안 울음소리를 내지 않아 소음 불편도 줄일 수 있다.
경남 창원 마산합포구 한 아파트에 철거 후 재설치한 길고양이 급식소. 사진 창원길고양이협회
박혜경 부산동물사랑길고양이보호연대 대표는 “고양이는 영역 동물이라, 단순히 먹이를 주지 않는다고 줄어들지 않는다”며 “오히려 먹이를 주지 않아서 길고양이가 음식물쓰레기 봉투를 훼손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한다”고 했다. 이어 “길고양이 급식소는 공존하는 도심 생태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동물보호단체는 길고양이 급식소가 일부 캣맘·캣대디의 무분별한 먹이주기 행위를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최근 아무 곳에나 고양이 사료를 주면서 이를 관리하지 않아 방치된 사료에 해충이 꼬이는 등 민원이 잇따라 제기된다고 한다. 최인숙 창원시길고양이협회 회장은 “지정된 먹이 장소에 필요한 양만큼 사료를 두고 관리하면 훨씬 청결하게 관리할 수 있다”면서도 “단순히 급식소를 설치하는 데 그치지 않는 게 아니라, 민·관이 함께 논의해 급식소를 관리할 역할과 책임을 명확히 해야 장기적으로 (급식소가) 유지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부산·창원=안대훈 기자 an.daehu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