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가장 많은 돈과 시청자가 몰린 크리켓 대회이자, 가장 명백하게 정치화된 월드컵.”
지난 10월 5일부터 11월 19일까지 46일간 인도에서 진행된 2023 국제크리켓협회(ICC) 크리켓 남자월드컵에 대한 알자지라·이코노미스트·파이낸셜타임스(FT) 등 외신들의 총평이다. 이들 매체들은 내년 총선을 앞둔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가 인도의 국민 스포츠인 크리켓에 민족주의와 힌두교의 이미지를 덧입혀 3연임을 위한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인도 구자라트주 아메다바드의 나렌드라모디 스타디움에서 관중석에 있는 크리켓 팬이 모디 총리의 가면을 쓰고 경기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AFP=연합뉴스
印 애국적 자부심 수단된 크리켓 월드컵
실제로 이번 월드컵에서 인도인들은 관중 수, 시청률 기록 등을 죄다 갈아치웠다. ICC에 따르면 이번 월드컵 기간 경기장 관중 수는 125만307명, 스트리밍 서비스 시청자(디즈니플러스 핫스타)는 인도 내에서만 5억1800만 명이었다. 최대 빅매치였던 인도 대 파키스탄 경기는 3500만명이 동시 시청했다. 499루피(약 7740원)~2만4000루피(약 37만원)인 티켓의 암표 가격이 570만 루피(약 8840만원)까지 치솟았다.
지난달 19일 인도·호주의 결승전은 5900만 명이 동시접속해 세계 스포츠 중계 역사상 최고의 동시 시청률을 기록했다. 우승은 호주가 차지했다. CNN은 “크리켓 국가 대항전 시청률은 미국 슈퍼볼의 5배 규모”라면서 “라이벌로 볼만한 스포츠가 없다”고 전했다.

지난달 19일(현지시간) 아메다바드의 나렌드라 모디 경기장에서 열린 2023 ICC 남자 크리켓 월드컵 결승전이 끝난 뒤 불꽃놀이가 시작되고 있다. AFP=연합뉴스
집권당이 장악한 인도 크리켓
이런 인기 이면엔 정치 포퓰리스트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고 있다고 매체는 짚었다. 이코노미스트는 “원래 인도 정부와 국민 모두 스포츠에 관심이 없었다”면서 “1928~56년 인도 하키팀이 6회 연속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하는 압도적인 기록을 세웠지만 정작 인도에선 어떠한 관심도 끌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지난달 19일(현지시간) 인도 크리켓 주장인 비라트 콜리(오른쪽)가 결승전이 끝난 뒤 준우승 메달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뒤쪽에는 인도 크리켓 관리위 사무총장인 제이 샤. 로이터=연합뉴스
반면 크리켓엔 정부‧기업·미디어가 전폭적인 지원을 쏟아붓고 있다. 특히 집권당인 인도인민당(BJP)이 인도 크리켓 조직을 장악하면서 이 스포츠의 영향력을 의도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실제로 현재 인도 내 크리켓의 전 분야를 통제하는 인도크리켓관리위원회(BCCI)의 사무총장은 모디 총리의 오른팔로 불리는 아미트 샤 전 내무장관의 아들 제이 샤다. BCCI의 주요 직책인 재무관 역시 뭄바이 출신의 BJP 정치인 아시시 셀러가 맡았다.
BCCI가 2008년 출범시킨 인도 프리미어리그(IPL)의 수장은 모디 내각의 스포츠장관 아누락 타쿠르의 형제 아룬 두말이다. IPL은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크리켓 리그이자 미국 프로미식축구리그(NFL)에 이어 매출 순위 2위인 프로리그다.
이를 두고 FT는 “세 사람 모두 행정적 역량보다는 모디 총리와의 관계, BCCI에 대한 BJP의 통제 강화 차원에서 임명됐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라고 지적했다. 알자지라도 “과거 다른 정당에서도 BCCI를 이끈바 있지만, BJP처럼 노골적으로 BCCI를 직속 연결하고 광범위하게 통제한 경우는 없었다”고 전했다. 이번 월드컵에서도 샤 사무총장이 주요 이벤트의 일정·장소·티켓 판매 등을 결정하는 실질적인 디렉터이자 대변인 역할을 했다.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크리켓, 힌두 내셔널리즘 이미지화"
모디 총리는 2020년 경기장이 완공되자 첫 행사로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과 공동 집회를 열었다. 지난 3월엔 앤서니 알바니스 호주 총리과 함께 황금 마차처럼 꾸민 카트를 타고 경기장을 누볐다. 인도의 역사가이자 소설가인 무쿨 케사반은 “이번 월드컵이 선거를 목전에 둔 BJP의 자체 축하행사라는 의도가 장소 선정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올 3월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오른쪽에서 두번째)와 앤서니 알바니스 호주 총리가 양국 크리켓 경기 전에 나렌드라모디 스타디움에 등장하고 있다. AP=연합뉴스
BJP가 크리켓을 정치 도구로 삼는 이유는 “식민 시대 영국에서 만들어진 스포츠이자, 파키스탄과의 경쟁 등을 통해 종교·민족성이 투영된 종목”(FT)이기 때문이다. 특히 모디의 통치 아래, 인도 주류 언론까지 나서 인도 크리켓팀을 ‘힌두 내셔널리즘’의 상징으로 변모시키고 있다.
크리켓은 인도를 영국에서 시작돼 17·18세기 동인도 회사 상인과 군인들을 통해 인도 전역과 영연방에 퍼졌다. 월드컵 성적은 인도가 종주국 영국을 압도했다. 인도는 1983년 영국의 런던로드 크리켓 경기장에서 열린 3회 ICC 크리켓 월드컵에서 우승하며 크리켓 붐이 일었다. 이 우승 스토리는 ‘핍박받던 약자의 승리’라는 민족주의 서사가 덧입혀져 발리우드 영화로도 제작됐다. 인도는 2011년 월드컵에서 두번째 우승을 했고, 영국은 2019년에야 첫 우승을 거뒀다.
파키스탄과의 갈등도 크리켓 인기에 기폭제가 됐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1947년 영국에서 분리독립한 뒤 잠무·카슈미르에 대한 영유권을 놓고 수차례 전쟁을 치렀고, 핵무기 경쟁도 벌였다. 이런 역사적 배경 탓에 양국 경기는 ‘최대의 블록버스터’로 불린다.
알자지라는 “문제는 BJP 정부가 반(反) 파키스탄이 아니라 반 무슬림이란 사실”이라며 “파키스탄과의 경기를 힌두 축제일로 잡거나, 파키스탄 선수들이 머무는 호텔에서 소고기 메뉴를 모두 빼는 등 크리켓 경기와 힌두교를 노골적으로 결합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번 월드컵에선 양국 경기 때 관중석을 메운 인도 관중들이 힌두교 전사 신을 찬양하는 구호인 “자이 시리 람”을 외치며 파키스탄 선수들을 조롱하기도 했다.

지난달 24일(현지시간) 인도의 육군 장교들이 잠무 지역의 군 병원에서 열린 화환 헌화식에서 전투 중 사망한 동료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모디 "2036 올림픽 유치"…구자라트 유력
크리켓과 힌두 내셔널리즘이 강하게 결합할수록 크리켓의 인기는 BJP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알 자지라는 “이번 월드컵에서 인도가 우승했더라면 BJP는 조기 총선을 치렀을 것”이라고 전했다. 칼럼니스트 수레시 메논은 더힌두 기고문에 “이번 대회는 비라트 콜리(인도), 벤 스톡스(영국), 자스프리트 범라(인도) 등 전설적인 선수들의 무대가 아니라, ‘BJP의 월드컵’으로 기억될 것”이라며 “장기간의 선거 캠페인에 불과했다”고 비판했다.

나렌드라 모디(오른쪽) 인도 총리가 지난 9월 인도 뉴델리 라지가트의 마하트마 간디 기념관에 도착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가운데)을 환영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내년 총선 전까지 인도의 크리켓 열기는 계속 달아오를 것으로 전망했다. 크리켓은 2028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개최국 선정 종목으로 채택돼 128년 만에 올림픽에 복귀한다. 뉴욕타임스는 “인도의 높아진 위상을 보여주는 결정”이라 전했다. 모디 총리는 이를 계기로 2036년 올림픽 유치 의사를 밝혔다. AP통신 등은 “나렌드라모디 스타디움이 있는 구자라트주 아메다바드가 올림픽 유치에 나설 유력 도시”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