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TV토론이 끝난 뒤 악수마저 생략한 채 냉랭하게 돌아섰던 해리스 부통령과 트럼프 전 대통령이 11일(현지시간) 오전 미국 역사상 최악의 참사로 평가되는 9·11 테러 23주년 추모식에 나란히 참석했다. 테러리스트의 항공기 충돌로 무너진 세계무역센터(WTC)가 있던 뉴욕 맨해탄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에서 두 후보는 조 바이든 대통령을 사이에 두고 짧은 악수를 나눴다.
'폭발 시작점'을 뜻하는 그라운드 제로에서 두 후보가 악수를 나눈 이날 미국 대선은 본격적인 막판 레이스로 돌입했다. 투표일(11월 5일)을 50여일 남긴 이날 앨라배마 주정부는 미국에서 가장 먼저 우편투표 용지를 발송하고 투표 절차를 시작했다. 16일에는 이번 대선의 최대 격전지 펜실베이니아를 시작으로 현장 사전투표도 개시된다.
전문가들은 중앙일보에 TV토론에서 사실상 승리하는 등 해리스가 유리한 상황에서 대선 레이스의 마지막 트랙에 들어섰다는 데 이견이 없었다. 다만 여전히 승패에 대한 전망은 유보했다.
이에 대해 로버트 슈멀 노터데임대 교수는 “불과 50여일 전까지 바이든이 사퇴할 거란 것을 누가 알았겠느냐”며 “정치에서 50일은 영원(eternity)에 가까운 긴 시간”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요동쳐왔던 여론이 남은 기간 중에도 얼마든지 완전히 뒤바뀔 수 있다는 의미다.
강성 지지층…“토론 패배로 잃을 것 없다”
마지막 스퍼트를 앞둔 공화당의 분위기는 좋지 않다. 예상 외의 일격을 당했다는 평가를 받는 TV토론 이후 당내에선 “대선 승리의 길이 좁아졌다”는 말까지 공공연하게 나온다. 토론 주관사인 ABC방송의 편파성을 탓하는 주요 인사들의 발언도 하루 종일 이어졌다.
그러나 TV토론으로 초박빙의 판세가 급격하게 변할 가능성에는 회의적 의견을 내놨다. 맥 셸리 아이오와주립대 교수는 본지에 “해리스가 토론에서 트럼프를 확실히 앞선 것은 사실이지만, 이번 토론으로 트럼프가 크게 잃을 것은 없다”고 평가했다. 근거는 트럼프에 대한 강한 충성도를 가진 지지층이다.
셸리 교수는 “트럼프의 지지자들은 트럼프가 막말을 활용해 반복해온 불법이민자나 이른바 급진좌파의 집권으로 초래될 ‘공포와 혐오’에 집착하는 성격이 강하다”며 “트럼프가 거짓말을 하더라도 지지층의 충성도가 높아 투표 성향을 바꿀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평가했다.
트럼프는 지난 2번의 대선에서 모두 46%대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번에도 각종 악재에도 지지율에는 큰 변화가 없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해리스에게 오차범위 내 우위를 내준 것 역시 트럼프의 지지율 하락이 아닌 민주당 지지층이 결집했기 때문이다. 확장력에 한계를 가진 트럼프의 선거 전략이 미래 비전 보다는 ‘콘크리트 지지층’을 기반으로 상대를 비난하고 약점을 부각해 결집을 방해하는 데 맞춰진 것도 이런 배경과 관련이 있다.
‘무관심층’ 공략 과제…“스위프트 효과 미지수”
공화당과 달리 민주당의 분위기는 한층 고조됐다. 그런데 정작 해리스는 토론 직후 “(선거일까지) 50여일이 남았고 아직 할 일이 많다”며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이러한 반응 역시 해리스가 가진 지지층의 특성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문제는 당선을 위해 해리스가 확장해야할 젊은층이 대체로 정치에 무관심한 이른바 ‘정치 저(低)관여층’이라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타이밍을 재던 팝스타 테일러 스위프트가 TV토론 직후를 공식지지 선언의 시점을 삼은 것도 치밀하게 기획된 선거전략일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했다. 해리스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진 상황에서 나온 그의 인스타그램 계정인 하루만에 ‘좋아요’가 1000만개를 넘어섰다.
다만 셸리 교수는 “스위프트 효과가 분명히 나타나고 있지만, 정치에 무관심한 젊은층의 행동이 단순한 관심 표명을 넘어 실제 투표로까지 이어질지는 미지수”라며 “해리스가 이들을 투표장으로까지 이끌어낼 수 있느냐가 승패를 결정할 변수가 될 수 있다”고 했다.
TV토론으로 해리스가 얻은 '무기'
전문가들은 해리스가 TV토론에 거둔 진정한 성과는 돈이라고 입을 모은다. 미국 선거에서 정치 후원금은 유권자들의 참여도를 측정하는 가장 확실한 기준이자, 선거 캠페인을 이끌 수 있는 실질적인 동력으로 꼽힌다.
민주당의 온라인 기부 플랫폼인 ‘액트블루’에는 TV토론 직후 4300만 달러(약 577억원)의 후원금이 몰렸다. 이는 팀 월즈 미네소타 주지사가 해리스의 부통령 후보로 지명된 날 이후 하루 기준 최다 모금액이다.
해리스는 지난 7월 바이든 사퇴 이후 한달간 3억6100만 달러(약 4797억원)을 확보하며 트럼프 캠프의 모금액을 3배 가까이 앞섰다. 짧은 기간 해리스가 급격하게 인지도와 지지율을 높인 배경은 매달 3배 이상의 광고비를 지출해온 자금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충분한 ‘실탄’을 확보한 해리스는 오는 14일 워싱턴 일정 외에는 직접 참석하는 모금행사 계획이 없다. 반면 트럼프는 유타와 캘리포니아 등지를 직접 돌며 모금행사에 참석할 예정이다. 이는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 설득을 해야 할 ‘시간 싸움’이 최고조에 이르게 될 선거 막판으로 갈수록 두 사람의 결정적인 차이가 될 수도 있다.
객관적 상황은 ‘박빙’…한국엔 외교·경제 과제
다만 여론조사 지표 상 미국의 대선은 여전히 팽팽한 ‘박빙’ 상황이다. 특히 사실상 6~7개의 경합주(swing state)의 선거 결과에 따라 승패가 좌우되는 미국 대선의 특성상 진행 중인 ‘두개의 전쟁’ 등 외부적 변수를 비롯해 경제 상황과 물가 등이 선거 막판 특정 경합주에 의외의 폭발력을 발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번 TV토론을 통해 두 후보가 완전히 다른 외교·경제 노선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 다시 한 번 확인되면서 한국이 입장에선 미국의 정치적 불확실성에 대한 충분한 대비가 필요하다는 과제가 분명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서정건 경희대 교수는 “선거 과정에서 미국인들이 트럼프가 강조해온 미국 우선주의와 비개입주의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고 있다”며 “미국의 국내적 정치 양극화로 인해 외교 정책 차원의 변화가 발생할 가능성에 대해 충분한 대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