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더중앙플러스 - 레드재민의 ‘빨간맛 축구’
대한축구협회가 최근 홍명보 감독의 선임 과정에서 절차상의 문제로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협회가 동네 계모임이냐”는 강도 높은 비난이 나오는 가운데, 축구협회에 대한 여론이 더욱 악화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논란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닌, 축구협회를 둘러싼 오랜 문제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클린스만 전 감독 선임 때부터의 잡음, 손흥민과 이강인의 ‘탁구 게이트’ 논란 등 바람 잘 날 없는 한국 축구. 그 중심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잇단 잡음의 주인공, 정몽규 회장 이야기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한국 축구가 건강하게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요. 이 근원적이면서도 어려운 질문에 해답을 찾기 위해 레드재민의 ‘빨간맛 축구’ (https://www.joongang.co.kr/plus/series/212) 기사 한 편을 무료로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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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같은 승리로 마무리한 16강전과 8강전 또한 짜릿한 경기 결과가 불안한 내용에 대한 기억을 임시 삭제한 것에 불과하다. 클린스만에겐 위기에 대처할 전술 능력이 부족했다. 그의 곁을 지키는 코칭스태프도 결핍을 메우지 못했다. 위기 상황과 맞닥뜨릴 때마다 만병통치약처럼 되뇌던 마법의 주문 ‘파이팅’은 결국 요르단과의 준결승전에서 한계에 부닥쳤다. 심지어 결승행을 앞둔 중요한 길목에서 우리 선수들끼리 서로 반목하고 갈등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며 “다른 건 몰라도 선수단 장악 능력만큼은 탁월하다”던 클린스만 감독의 유일무이한 장점마저 퇴색돼 버렸다.
아시안컵 직후 자진 사퇴 가능성을 묻는 미디어의 잇단 질문에 클린스만 감독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임 당시 KFA와 함께 작성한 계약서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긴 어렵지만, 아시안컵 성적(4강)에 따라 2년6개월의 잔여 임기를 보장 받은 것으로 보이니 스스로 지휘봉을 내려놓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에도 여론이 악화일로를 걸으면서 결국 그는 지휘봉을 내려놓게 됐다. 어쨌거나 축구대표팀은 뒤숭숭한 분위기를 쇄신할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정몽규 회장은 다르다. 임기가 2025년 1월까지다.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않는 한 KFA 내부적으로 또는 외력이 개입해 회장을 교체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심지어 체육계에서는 정 회장이 축구협회장 4연임에 도전할 것이라는 설이 파다하다. 본인의 최대 치적이 돼야 할 천안축구종합센터 완공 시점이 자꾸만 뒤로 밀리는데, 정 회장 측은 “축구종합센터 문제를 마무리 짓기 위해서라도 한 번 더 임기를 연장해야 한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아시안컵으로 불붙은 팬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를 정도지만 정 회장은 요지부동이다. 한국 축구대표팀의 국제 경쟁력을 떨어뜨린 상황에 대해 책임을 지려는 의사는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우울하다. 정 회장이 한국 축구의 핸들을 쥐고 있는 한 현재의 혼돈이 반복될 가능성이 커 보여서다.
정몽규 회장은 2013년 1월 KFA의 수장직에 오른 이래 3선에 성공하며 12년째 한국 축구를 이끌고 있다. 강산이 한 번 변하고도 남을 세월 동안 최고결정권자의 지위를 유지했으니 정상적이라면 KFA 내에 정 회장 체제가 자리를 잡고도 남았어야 한다. 아쉽게도 ‘정몽규호’ 깃발 아래에서 KFA는 연일 내려앉고 뒷걸음질치기 바쁘다. 행정·경영·외교 등 주요 지표에서 모두 낙제점이다. 지난해 3월 KFA가 프로축구 승부조작 주범을 포함한 축구인 100인에 대해 기습적으로 사면을 강행하려다 여론과 정치권의 역풍을 맞아 결정을 뒤집은 게 대표적이다. 당시 협회 임원진이 총사퇴하는 분란을 겪고도 정 회장은 세상의 목소리에 귀를 닫았다.
사령탑 선임 과정에 정 회장의 의중이 상당 부분 반영됐다는 소문도 축구계에 파다하다. 사실이라면 클린스만 감독이 원격 근무를 비롯해 이전에 없던 파격적인 일처리 방식을 보장 받으며 ‘마이 웨이’를 고수했던 상황적 배경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협회 관계자 A씨는 “KFA 내엔 클린스만 감독을 제어할 방법이 전무했다. 과거 대표팀 코칭스태프와 협력하면서 때로는 견제 기능도 수행했던 기술 파트 보고 체계도 사라졌다. 협회 내에서 감독에게 (대표팀 운영 관련) 의견을 낼 사람이나 조직이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한다. 축구인들은 “이제라도 사령탑 교체 결정이 내려진 건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협회가 감독 선임부터 기술 지원까지 대표팀 관련 업무를 관리하고 제어할 수 있는 시스템을 최우선으로 부활시켜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경영 면에서도 정 회장 체제는 낙제점에 가깝다. 2013년 축구협회장 선거에서 처음 당선될 무렵 정 회장은 “(당시 연간 1000억원 수준이던) 협회 예산을 2000억~3000억원 규모로 끌어올리겠다”는 공약을 내세워 축구인들의 표심을 사로잡았다. 현대가(家) 2세이자 HDC현대산업개발 총수가 던진 공약이니 꽤 믿음직해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현실은 딴판이다. 10년이 넘도록 협회 살림살이는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정 회장 체제 출범 직후 편성한 2014년 당시 KFA 연간 예산은 891억원이었다. 2024년 예산에서 천안 축구종합센터 건립 비용을 뺀 일반 예산은 1021억원이다. 증가율 14.6%는 11년이란 세월에 비해 지나치게 초라하다.
그간 한국 축구 시장의 파이가 어마어마하게 커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협회 예산 증가율은 더욱 답답하게 느껴진다. 10여 년의 세월 동안 기성용(서울), 이청용(울산), 손흥민(토트넘), 이강인(파리생제르맹) 등 상품성 있는 스타들이 줄줄이 등장했다. 최근에는 OTT 시장의 확대와 맞물려 팬들이 스포츠 콘텐트에 합당한 비용을 지불하고 즐기는 문화도 자리 잡았다. A매치 티켓 판매가 개시되면 제일 비싼 티켓이 가장 먼저 매진되는 시대다. 이렇게 호재가 넘치는 시장에서 10년 넘도록 협회의 돈벌이가 14.6%밖에 늘지 않았다면 그건 실질적으로 퇴보라고 정의해야 옳다. HDC현대산업개발뿐 아니라 KFA에서도 정 회장의 경영 수완은 믿을 만한 구석이 적다.
그런데 일이 풀리지 않는다. 초기 완공 목표였던 2023년 6월은 이미 8개월이나 지났다. 그 와중에 기존 대표팀 훈련장인 파주트레이닝센터 사용 계약이 만료됐다. 전용 훈련장이 없어진 축구대표팀은 소집할 때마다 서울 시내 호텔과 훈련 시설을 떠돈다. 새 트레이닝센터 건립 비용은 천정부지로 뛰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악재가 겹쳐 인건비와 건축 자재비가 크게 상승한 탓이다. 최근 협회는 부랴부랴 제1금융권에서 300억원을 빌렸다. 앞으로 10년에 걸쳐 총 390억원을 상환하는 조건이다. 천안 이전으로 인해 발생한 금융 부담은 고스란히 차기 축구협회 행정부가 떠안아야 한다.
2022년 4월에 실시한 착공식(파울루 벤투 전 감독도 참가했다)을 기준으로 2년 가까이 흘렀지만 대표팀 선수들이 훈련할 수 있는 시설이 완공되기까지는 한참 더 시간이 필요할 전망이다. 최근 해당 부지를 둘러 본 A씨는 “허허벌판에 가까운 상태”라고 표현했다. 천안 이전 프로젝트는 협회 내부의 거의 모든 업무를 잡아먹고 있다. 협회 관계자 B씨는 “지금은 어떤 기획서든 비용이 발생하는 프로젝트를 올리면 대부분 ‘보류’ 처리다. 유소년, 여자 축구 등 신경 써서 관리해야 할 분야가 많은데, 돈이 드는 모든 사업이 ‘천안 이전’의 뒷전으로 내몰리고 있다. 협회 업무는 사실상 마비 상태”라며 혀를 찼다.
천안 이전은 해외파 축구대표팀 선수들의 국내 체류 기간 중 동선을 한층 복잡하게 만드는 악재이기도 하다. 기존 트레이닝센터가 위치한 파주는 인천국제공항과 서울의 중간에 있어 이동이 편했다. 천안 이전이 완료되면 해외파 선수들은 인천국제공항으로 귀국한 직후 천안으로 이동해 훈련한 뒤 A매치를 치르러 서울월드컵경기장으로 상경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국제무대에서의 외교력은 아예 참사 수준이다. 정 회장은 2015년 국제축구연맹(FIFA) 집행위원 선거에서 낙선했다. 2019년 FIFA 평의회 위원 자리마저 내준 뒤 현재까지 국제무대에서 권한 있는 직책이 전무하다. 지난해 2월 열린 FIFA 평의회 위원 선거에서 아시아 몫으로 배정된 5명을 뽑는 선거에 출마했지만 후보자 7인 중 6위로 탈락하며 자존심을 구겼다. 중국이 개최권을 반납한 2023년 AFC 아시안컵 유치 경쟁에 뛰어들었지만 최종 투표에서 단 한 표도 얻지 못한 채 카타르에 완패해 또 한 번 망신을 당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아시안컵 유치 경쟁의 최전선에 섰던 정 회장 본인조차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최근 사석에서 정 회장은 “어차피 한국에 있는 경기장들로는 메이저 대회를 유치하지 못한다”고 털어놓았다. ‘한국 축구의 성지’로 불리는 서울월드컵경기장이 대표적이다. 대형마트 등 건물 내에 자리 잡은 상업시설 탓에 월드컵이나 아시안컵을 포함한 국제 대회를 치르기 어려운 환경이다. 그런 현실을 숨긴 채 협회는 아시안컵 유치 전망이 밝다면서 정 회장이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며 ‘언론플레이’에만 열중했다. 한·중·일 3국 중에서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 심판진을 보내지 못한 국가는 한국이 유일했다. 2023년 아시안컵의 결승전 주심은 중국인이었다. 모든 게 협회의 외교력 부재와 연결돼 있다.
이번 아시안컵을 통해 한국 사회에서 축구가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대표팀이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이자 ‘전 국민이 들고 일어났다’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이번 클린스만 감독 해임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감독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축구대표팀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면, 한국 축구계가 긍정적 방향으로 진화하려면 감독 교체가 전부가 아닐 수 있다. 차제에 한국 축구를 이끌어가는 운전사를 바꿔야 하는 게 아닌지 검토하고 고민할 때다.
일부 팬은 클린스만 감독에 대해 ‘한국 축구를 망치려고 적국에서 보낸 스파이’라고 표현했다.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허탈한 기분을 드러내기 위한 또 다른 방법일 거라 이해하고 싶다. 하지만 어쩌면 ‘진짜 스파이’는 따로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우리 안에, 10년이 넘게 계속 말이다. 한국 축구를 정말 사랑한다면 감독 뿐만 아니라 ‘그분’도 결단을 내려주길 바란다. 축구 스타들과의 사적 친분은 ‘회장’이라는 직함을 달지 않아도 얼마든지 쌓을 수 있다. 한국 축구 발전을 갈망하는 팬들의 입을 틀어 막는 퍽퍽한 고구마. 그거 마이 무따 아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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