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 덩샤오핑은 중앙고문위원회를 만들었다. 후야오방(胡耀邦), 자오쯔양(趙紫陽) 같은 이들이 당 총서기와 국무원 총리를 맡아 정치의 전면에 섰다면 이들을 뒤에서 통제하는 실세는 중앙고문위원회의 이른바 ‘8대 원로’였다. 덩샤오핑과 그의 혁명 동지인 왕전(王震), 천윈(陳雲), 리셴녠(李先念), 펑전(彭眞), 쑹런충(宋任窮), 양상쿤(楊尙昆), 보이보(薄一波)가 그들이다.
이를 깨고 1인자에게 권력을 몰아주게 바꾼 것이 시진핑 체제다. 시진핑은 덩샤오핑 이후 지켜져 왔던 ‘공산당 총서기와 국가주석은 2연임으로 그친다’는 관례를 깨고 3연임 중이다. 총리와 다른 상무위원들의 결정을 자신이 ‘결제’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최근 이런 중국 권력 판도에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고 보이는 현상이 관측됐다. 중공 정권 수립일인 10월 1일 국경절 75주년 기념식에서 시진핑이 후진타오(胡錦濤) 정권 시절 총리였던 원자바오(溫家寶)를 초청해 환담하는 모습이 관영 언론에 공개됐다. 이를 두고 경제 정책 실패로 위기에 몰린 시진핑이 그동안 배척했던 당 원로들을 달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국경절 하루 전인 지난달 30일 열린 리셉션에서 원자바오는 시진핑 바로 왼편에 앉았다. 최고 주빈 대우를 받은 셈이다. 시진핑의 다른 쪽 옆자리에는 장쩌민(江澤民) 시기 정치협상회의 주석이었던 리루이환(李瑞環)이 자리했다.
시진핑은 그간 당 원로들을 찬밥 취급해 왔다고 알려졌다. 장쩌민과 권력 투쟁을 벌인 것은 베이징 정가에 파다했다. 후진타오 전 국가주석은 2022년 10월 중국 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 폐막식 도중 석연치 않게 퇴장하면서 ‘강제 퇴장’ 논란이 일었고, 이후 공개석상에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해외 중화권 매체들은 시진핑이 원자바오와 환담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뭔가를 얻으려 했다고 분석했다. 원로 정치인들에게 구애하고 아첨하는 자세를 취해 위기의 순간에 자신을 지지해달라는 일종의 설득 행위라는 것이다. 2022년 후진타오를 끌어내다시피 퇴장시키던 때와 180도 달라진 모습이다. 그해 장쩌민 사망 추모식 때도 전현직 당 지도부가 대거 참석했지만 관영 매체에서는 후진타오의 참석만 소개됐을 뿐 다른 당 원로들은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았다. 그 시기 당 원로들은 사실상 가택 연금됐으며 정치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엄격히 금지됐다. 중국 공산당은 역대로 당 원로들의 입김이 강한 정치 집단이었으나, 시진핑이 권력을 독점한 후 원로들의 존재감은 증발했다.
지난해 같은 행사 때 모든 조명은 시진핑에게 쏟아졌다. 원래 정권 수립 기념 리셉션은 총리가 주최하고 연설도 총리가 맡는 것이 관행이었다. 국가주석은 5주년마다 한 번씩만 연설했다. 그런데 지난해 리셉션 때는 이례적으로 시진핑이 연단에 올랐고 리창(李强) 총리는 철저히 들러리로 전락했다. 당 원로들은 이름조차 호명되지 않았다. 그런데 올해 리셉션에는 당내 온건파인 원자바오가 주빈으로 등장했고 리루이환 등 주요 원로 참석자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호명됐다.
중화권 매체들이 인용한 베이징의 한 소식통은 “최근 원로 정치인들의 가택 연금이 해제됐다”며 “1~2년 사이 상황이 정반대로 돌변했다. 원로들이 중요 행사에 주빈으로 초청되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 7월 열린 중공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3중전회)에서 뭔가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소식도 들리고 있다.
이 ‘중대한 변화’란 권력 누수를 뜻한다. 인민해방군에선 최근 대대적인 숙청이 이뤄졌다. 공식적으로는 ‘부패’ 문제가 거론됐지만, 시진핑이 임명한 측근들의 정치적 배신이 적발됐다는 게 중화권의 중론이었다. 시진핑의 군부 장악력이 약화되면서 당권이 약화됐고, 그동안 무시했던 당 원로 세력에게 손을 내밀어야 할 처지가 됐다는 것이다.
이번 리셉션에선 시진핑이 상석에 앉은 메인 탁자에 현 정치국 상무위원 7명 포함 총 23명이 둘러앉았다. 원자바오와 리루이환을 비롯해 15명이 퇴임한 고위층, 즉 당 원로들이었다. 중화권 매체들은 이 광경을 “일정 부분 집단 지도체제를 복원한 것”으로 평가하며 “시진핑은 정치적 위기, 전례 없는 경제적 위기, 서방 국가들에 둘러싸인 외교적 위기로 불안정한 처지에서 단결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고 했다.
신화통신의 보도사진을 보면 큰 테이블이긴 하지만 23명이 앉다 보니 조금 비좁아 보인다. 하지만 권력 서열에 따라 계층 구분이 뚜렷한 중공 시스템에서는 아마도 일진들은 모두 같은 테이블에 앉아야만 했었을 것이다. 그만큼 시진핑이 신경 써야 하는 인사가 많아졌다는 뜻이다.
차이나랩 이충형 특임기자(중국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