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석조 문화재 미스터리 여행
1942년 그 속에서 나온 손바닥만 한 순금 불상 두 좌(座·불상을 세는 단위)가 국보가 되고, 그 자체가 국보가 된 삼층석탑.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알려진 사실. 마침 이곳을 찾았던 박홍국 위덕대 연구교수는 이들에게 “여기를 잘 보십시오. 탑에 새겨진 이 네모반듯한 공간은 무엇을 뜻할까요”라고 물었다. 보문들을 바라보는 탑의 동면 기단 왼쪽 위 직사각형의 홈. 경주 여행 미스터리의 시작이었다. 일행은 단순한 물음이 아닌 걸 직감한 듯 “비밀장치” “숨구멍” 등 기상천외한 답을 내놓기도 했다. 박 교수는 “신라 석공의 수리, 콩글리시이기는 하지만 지금 말로 하면 A/S 흔적”이라고 밝혔다.
세월 흐르며 땜질 자재 떨어져 홈만 남아
박 교수가 최근 신라사학보에 게재한 연구 논문 ‘신라 석조문화재의 부분 수리 흔적’에 따르면 신라 석공들은 어떤 이유로 파손된 석탑과 비석·불상 등을 깔끔하게 고치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들은 파손된 부위보다 더 크게 네모꼴로 절개한 뒤 아교·유황을 섞은 천연 접착제로 같은 석질의 자재를 붙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땜질 역할을 한 자재가 떨어지면서 ‘네모’가 남았다는 것(그래픽 참조). 부산 4총사와 대학원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박 교수의 설명은 자리를 옮겨 이어졌다.
황복사지 삼층석탑을 안고 있는 낭산 서쪽 너머에 남산이 있다. 남산의 긴 그림자가 탑에 걸칠 듯 말 듯 한 늦은 오후. 오솔길처럼 난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어르신들이 뭔 일 있어 왔나 한 번 쳐다본다. 그만큼 한갓진 곳에 두 탑이 있다. 남산동 동·서 삼층석탑(보물)은 다보탑·석가탑처럼 ‘쌍탑’으로 알려져 있다. 더군다나 동탑은 모전석탑, 서탑은 전형적인 삼층석탑으로 서로 건축 양식이 달라 더욱 진귀하게 여겨진다는 게 정설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논란이 있다. 건축 시기가 달라 양식이 다른 것이고, 동서 일직선 상에 위치하지도 않아 쌍탑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하튼, 이 동탑에도 수리 흔적이 있다. 무려 세 곳이다. 가장 눈에 띄는 곳은 기단에 있다. 기단 네 개 면마다 네 편의 큰 석재가 맞닿아 있는데, 엇갈리게 쌓아 탑의 하중을 분산시키려는 세 면과 달리 정면은 십자(十字)로 물려있다. 이 물린 부분이 터져나갔고, 석공은 급히 A/S에 들어갔다는 게 박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탑 주변 어딘가 땜질에 사용한 석재가 묻혀 있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박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이런 ‘성형 수술’ 혹은 ‘정형외과적 수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수리 기법은 제천 월광사지 원랑선사탑비(통일신라·보물)에도 그대로 쓰였다고 한다. 원랑선사탑비는 일제강점기인 1922년 월광사 터에서 경복궁으로 옮겨진 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있어 일반인은 볼 수 없다. 신라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금석문이다. 제천 사람들의 소원 중 하나가 이 탑비를 돌려받는 것이라고 할 정도인데, 실제 반환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 비석 중간 측면에 가로 17㎝, 세로 47㎝, 깊이 6㎝의 절개 부위가 드러나 있다. 비석이 부러질 것을 우려해 석탑의 경우와 달리 6㎝가 넘지 않게 팠던 것으로 보인다. 박 교수는 “이 정도의 비석은 비각(碑閣·비석을 모시는 전각)을 세우기 때문에 건립 이후엔 파괴될 이유가 없고 아마 그 이전에 파손돼 수리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박 교수는 “불상의 등에도 약사여래불이 새겨진 점을 고려하면 신라의 불자들은 탑돌이 하듯 불상을 돌며 기도를 올렸을 것”이라며 “그런데 저쪽(불상의 우측) 남산의 급경사에 웅크리고 있던 마사토가 쏟아져 내려와 광배가 쓰러지면서 윗부분이 날아갔다고 유추할 수 있다”고 전했다. 그는 화재 가능성에 대해서는 “불이 났다면 잘 생긴 석조여래좌상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석재가 열기에 팍팍 튀어나가 형체를 온전히 남기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신라의 석공들이 수리했을까. 박 교수는 “보시다시피 뭔가 허술하지 않으냐. 석공 기술의 정점에 있던 신라 때는 아닐 것”이라며 “불상 근처에 조선 시대 중수비(重修碑·수리 내용을 표시하는 비석)의 일부가 남아 있는데, 당시 광배 윗부분을 수리하면서 비석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다시 북쪽. 경주는 지금 가을 수학여행 시즌이다. 국립경주박물관에는 열 살 남짓한 아이들이 1000년 넘은 유물들 앞을 메웠다. 경주 문화재 미스터리를 이어가고 싶다면 박물관의 신라천년보고에서 ‘경주 203’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비석 조각이라고 해서 비편(碑片)이라고 부르는 유물의 고유 번호다. 황복사지 혹은 사천왕사지로 추정되는 곳에서 발견됐다.
앞뒷면에 글자가 있다. 그래서 비석의 일부로 보는 이유다. 그런데 앞뒷면 글자 방향이 서로 다르다. 게다가 두께는 4.5㎝에 불과하다. 20~25㎝인 신라 비석 두께에 턱없이 모자라다. 적어도 한쪽 면은 없는 셈 치자는 의도가 이 비편에 숨어있다.
“허술한 접합, 신라의 석공 솜씨 아닌 듯”
수리 흔적이 남아 있는 신라 석조 문화재는 더 있다. 성덕왕릉 앞 귀부(龜趺·거북 모양으로 만든 비석의 받침돌)의 떨어져 나간 부분에 급히 새긴 문양이 보인다. 특이하게도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에는 수리를 위해 넣은 석재가 네모난 홈 안에 남아 있다. 구미 죽장리 오층석탑에도 수리 흔적이 있다.
신라 석공이 아니라 이후 다른 시대나 일제강점기의 석공이 수리했을 가능성은 있지 않을까. 박 교수는 “새로운 왕조는 변방이 되는 전 왕조의 수도까지 가서 수리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며 “일본에서 신라 석공의 A/S 기법으로 수리한 예가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고, 일제강점기에 이런 식으로 수리했다면 현재까지 땜질용 석재가 온전하게 붙어 있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황금빛이 바람에 술렁거려 퍼지는 보문들. 넘어가는 해마저 하루의 마지막인 듯 황금빛을 뿜어낼 때, 황복사지 삼층석탑은 순간 일렁거린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