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 미술가 김수자, 영화감독 박찬욱, 현대 무용가 안은미, 피아니스트 조성진. 이름만으로도 한국 문화예술을 대표하는 4인이 한자리에 모인다. 22일부터 29일까지 서울 한남동 ‘파운드리 서울’에서 열리는 사진전 ‘두 개의 이야기: 한국 문화를 빛낸 거장들을 조명하며’에서다.
인물 주제 살리는 이미지 더한 '딥틱' 기법
그는 2022년 작고한 이어령 선생의 마지막 모습을 찍었다. 당시 선생은 스스로도 몰랐던 자신을 발견했다며 무척 만족스러워했다. '형식은 본질의 표면이지만, 진실은 보이는 것 너머에 있다'고 믿는 그에겐 최고의 칭찬이었다. 이번에도 작가는 ‘딥틱(DIPTYCH)’이라는 기법을 통해 인물의 본질을 엿보려 했다. 딥틱은 마치 경첩처럼 한 쌍을 이루는 두 개의 ”판을 이르는 말. 대가의 초상 옆에 그를 대변하는 이미지를 병치시키는 구성이다.
가령 작품 '사유'에선 김수자의 지긋이 내려다보는 얼굴 옆에 연잎을 배치했고, '비룡승운'에선 묵직하게 정면을 응시하는 박찬욱 옆으로 용의 탈을 쓴 남자를 등장시켰다. 안은미와 매화(작품 ‘도망치는 미친 년’), 조성진과 바위(‘빛나는 청춘’) 도 딥틱을 통해 새로운 해석을 얻었다. 그는 “한국의 문화적 토양과 배경에서 성장한 세계적 아티스트들이기에 인물을 표현하되 한국적 맥락을 녹여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딥틱을 생각해 낸 이유가 특별히 있나.
“얼굴 사진은 굉장한 이야기, 하나의 역사성을 갖고 있다. 게다가 피사체가 보통 인들이 아니지 않나. 이미 인생·흔적· 철학이 다 나타난다고 본다. 이 스토리를 좀 더 포괄적으로 강조해 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두 장의 사진을 두는 딥틱이라면 주제가 좀 더 분명해지고 이야기가 풍성해지겠다 싶었다.”
-한 사람에 대한 주제, 더구나 이미지로 표현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관점이 필요한 작업이다. 가령 김수자 선생은 단순한 아티스트가 아니다. 이주, 정체성, 피난, 문화 종교적 충돌 또는 만남, 삶과 죽음을 둘러싼 경계에 관해 끊임없이 사유하는 자다. 내게 선생은 철학자 혹은 구도자로 다가온다. 그래서 '사유'라는 타이틀을 짓고 종교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깨달음의 경지, 다른 세상으로의 초월을 상징하는 연잎을 골랐다.”
-안은미와 매화, 조성진과 바위는 어떤 의미인가.
“안은미 선생은 사회의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 속에서도 늘 새로운 무대를 보여주는 분이다. 그의 선구자적 정신과 고고함을 매화로 표현해 봤다. 조성진의 경우 언제 봐도 소년 같은 이미지지만 연주에 바치는 시간과 노력, 그리고 기량은 어떤 대가 못지않다. 그 모습이 시간의 흐름, 자연 현상을 견뎌내면서 결국 독특한 형상을 만들어 낸 바위와 흡사하다고 느꼈다."
“영화 감독에겐 신화적 용 같은 리더십과 카리스마는 필수적이다. 그런데 박 감독은 예전에도 몇 번 촬영해 보면 말이 없는 편이다. 이런 부류는 마음의 에너지가 굉장하지 않을까. 분노이든 열정이든. 감독이 복수 3부작을 낼 수 있는 것도 그래서 아닐까 생각했고, 이걸 용으로 표현해 봤다."
-인물에 대한 ‘공부’가 필요했을 것 같다.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분들이지만 이번에 키워드를 찾기 위해 준비를 많이 했다. 책을 읽고, 화집을 보고. 사전 대담도 하고. 개인적인 서사와 철학을 이해하고 제 나름의 관점을 만들면서 대상을 떠올렸다.”
“경지에 오른 이들은 가식이 없다. 카메라 앞에서 숨길 것, 꾸밀 것 없는 평정심을 보여 준다. 수도승 같다고 해야 하나. 장르는 다르지만 모두 자신이 갈 길만 끊임없이 매진하는 사람들이다. 구도자와 다르지 않다.”
휠체어 탄 백남준의 시선을 기록한 영상작 상영
- 이번에도 다른 시도가 있었나.
“사진 좋아하는 박 감독 소장품으로 카메라를 찍으려 했는데 낡은 수첩이 하나 있더라. 열어보니 무슨 난수표처럼 박 감독 본인만 알 수 있는 글이 가득했다. 70~80장이나 되는 걸 한 프레임에 담았는데, 거장 감독의 속내를 깊숙이 들어갔다 나오는 느낌이다. 김수자 선생도 손만 찍으려던 건 아닌데 보는 순간 작업 노동의 응집이 대단한 정신력으로 느껴져 마음을 바꿨다.”
-이런 새로운 시선은 어떻게 생겨날 수 있나.
“이거다 저거다 정답은 없다. 일단 해보는 거다. 해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게 경상도말로 ‘천지 삐까리’다. 조사하고 연구하고 스케치하면서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내고, 또 현장에 가서 더 나은 게 있다면 바꿔보는 거다. 고민만 하는 건 아무것도 안 하는 거다. 일단 찍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