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K파트너스·영풍의 고려아연 공개매수가 마무리된 가운데, 이를 바라보는 재계와 자본시장의 평가가 엇갈린다. 향후 사모펀드(PEF)가 주도하는 경영권 분쟁이 늘어날 가능성이 커졌지만, 재계는 자사주 매입 외에 마땅한 방어 수단이 없다고 우려한다. 반면 자본시장에선 지배구조 개선으로 기업 가치를 올리는 데 사모펀드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15일 재계에 따르면 MBK·영풍이 고려아연 공개매수에서 5.34% 지분을 확보하면서 최윤범 회장 측은 딜레마에 빠졌다. 진행 중인 고려아연 자사주 공개매수에서 물량을 많이 매입할수록, 상대측의 의결권 지분율이 과반에 가까울 만큼 커지기 때문이다. MBK·영풍은 고려아연의 자사주 매입량에 따라 의결권 기준 39~48%를 확보할 수 있는 상황이다.
최 회장이 지난 2일 ‘자사주 매입 후 소각’ 카드를 들고 나왔을 때부터, 자본시장에선 효과적인 방어 수단이 아니라는 지적이 나왔다. 자사주는 의결권이 없어 최씨 일가 지분뿐 아니라 장씨 일가의 지분가치도 높아진다. 이런 한계에도 당시 최 회장에게 다른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최 회장 개인의 자금 여력으론 거대 자본을 가진 MBK로부터 경영권을 지키기 어렵기에 고려아연 법인이 자사주를 매입하는 방식을 선택했을 것으로 해석됐다. 양측은 공개매수 경쟁에 이어 향후 주주총회에서 ‘표 대결’을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시장에서는 고려아연을 시작으로 사모펀드가 기업 경영권 분쟁에 직접 뛰어드는 사례가 늘어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그동안 국내에서 행동주의 펀드가 소수 지분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경우는 있었지만, 사모펀드가 직접 기존 주주와 손잡고 공개매수에 나서는 일은 드물었다. 저평가된 비상장사의 경영권을 인수해 가치를 올린 뒤 되파는 사모펀드의 기존 수익화 전략이 한계에 이르자, 경영권이 취약한 상장사들을 주목한 것으로 풀이된다. 한 자본시장 관계자는 “기업 가치를 올려 수익을 낼 수 있는 비상장사 매물이 많지 않다보니, 규모가 큰 상장사로 눈을 돌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창업자 이후 3, 4세대로 경영이 승계되면서 오너 경영자의 지분이 희석된 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고려아연처럼 동업 가문간 갈등이 생기거나 형제간 경영권 다툼이 생기면 사모펀드가 개입할 여지가 커진다. 증권가에서는 주요 주주 간 지분율 차이가 작고 주가가 저평가된 기업들을 중심으로 ‘제2의 고려아연’ 찾기 움직임도 있다. 통상 경영권 분쟁이 발생하면 주가가 단기적으로 급등한다.
기업들은 긴장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기존에 사모펀드들은 재무적 투자자로 대기업들과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였는데, 앞으로 돌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우려가 크다”며 “미국·일본·유럽 등은 모두 경영권 방어 수단들을 갖추고 있는데, 한국은 턱없이 부족하다”고 강조했다. 재계는 경영권 방어를 위해 차등의결권·포이즌필(신주인수선택권)의 도입을 오랫동안 요구해왔지만, 재벌 특혜 논란 등으로 추진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차등의결권은 대주주의 주식에 보통주보다 많은 의결권을 부여하는 제도다. 포이즌필은 적대적 인수합병(M&A) 상황에서 기존 주주들에게 할인된 가격으로 주식을 살 수 있도록 해 공격자의 지분율을 낮추는 방식이다. 정준혁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경영권 방어 수단 도입에 대한 찬반 입장이 팽팽하지만, 장기적인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정부 차원에서 논의를 시작해볼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반면 사모펀드 개입으로 기업가치 제고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도 있다. 정부가 저평가된 한국 상장 주식에 대해 ‘밸류업’을 추진하면서 주주가치 제고에 대한 요구가 커진 만큼, 사모펀드의 등장이 주주환원과 지배구조 개선을 유도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김우진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는 “고려아연 사건은 상장기업이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에 대해 큰 화두를 던진 것”이라며 “주주와 주가를 의식한 경영을 해야 한다는 것을 기업들이 알게 됐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용진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는 “기업들이 투명하고 선진화된 지배구조를 갖추는 데에 사모펀드의 역할이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