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 내내 소송하란 얘기"…재계 경악시킨 상법개정안

연말 정기국회 메가톤급 태풍 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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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 정기국회를 바라보는 기업들은 어느 때보다 불안하다. 메가톤급 불씨가 모락모락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어서다. 상법 개정안 얘기다. 21대 국회에서 무산된 상법 개정안이 22대 국회 가장 뜨거운 쟁점으로 부상했다. 지난 10월 국정감사가 끝날 즈음 더불어민주당은 상법 개정안을 당론으로 추진해 연말 국회에서 처리하겠다며 판을 키웠다. 현재 국회에는 21건의 상법 개정안 관련 법안이 발의돼 있다. 주주 이익을 해치는 기업의 의사결정을 강제적으로 원천 차단하겠다는 내용들이다. 재계는 안절부절이다. 발의된 개정안에 기업 경영에 치명상이 될 독소 조항이 많다며 ‘경영권 공격 수단으로 악용’ ‘일 년 내내 소송하라는 얘기’ 같은 우려를 쏟아내고 있다. 재계가 국회를 향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를 더컴퍼니가 살펴봤다.
상법 개정은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 해소 방안을 고민하다 시작됐다. 2000년대 들어 대기업의 사업구조 개편이나 구조조정 과정에서 소액주주가 손실을 보아도 피해를 구제받을 방법이 없다는 문제의식이 불거지면서다.

2021년 SK케미칼의 물적분할이 도마 위에 올랐다. SK케미칼은 2021년 3월 백신사업부문을 물적분할한 SK바이오사이언스 상장에 이어 같은 해 12월 산업전력 공급사업을 떼어내 SK멀티유틸리티를 세웠다. 카카오의 쪼개기 상장도 주주들의 비판을 받은 대표 사례다.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카카오의 쪼개기 상장도 주주들의 비판을 받은 대표 사례다. 카카오는 2020년 카카오게임즈에 이어 2021년 카카오뱅크(8월), 카카오페이(11월)를 잇달아 상장시켰고 카카오 주가는 다섯달 만에 20% 이상 하락했다. 특히 카카오페이는 상장 한 달 만에 경영진 8명이 주식매수선택권(스톡옵션)으로 취득한 주식 44만여 주를 처분해 878억원의 차익을 남기며 ‘먹튀’ 비난을 받았다.

2020년 LG화학 배터리 사업 물적분할도 논란거리였다. LG화학은 2020년 9월 17일 배터리 사업을 떼어내 물적분할(현 LG에너지솔루션) 했다.

남길남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모자 회사가 동시 상장될 경우 모회사가 보유한 자회사의 주식 가치가 더블카운팅(이중 계산)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 등이 있다”고 분석했다.


20대, 21대 국회에서 모두 폐기된 상법 개정안이 올해 다시 뜨거운 감자가 된 건 정부가 상법 개정안을 ‘정부안’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다.

‘한국 주식시장 육성’을 공약으로 내건 윤석열 대통령은 올해 1월 논의에 불을 지폈다. 한국거래소 개장식에서 “이사회가 소액주주의 이익을 책임 있게 반영하도록 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말하면서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도 지난 6월 자본시장연구원·증권학회 주관 세미나에서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 성공하려면 상법을 고쳐야 한다”고 말하며 윤 대통령 편에 섰다.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기업들도 지배구조 개선이나 소액주주 보호에 대한 필요성은 동감한다. 하지만 “소액주주 권한 강화 효과는 얻지 못하고 부작용만 초래할 것”이라는 반대도 만만치 않다.

재계에서 가장 크게 우려하는 조항은 이사 충실 의무 대상 확대다. 현재 상법 제382조의3에는 이사의 충실 의무에 대해 ‘이사는 법령과 정관의 규정에 따라 회사를 위하여 그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여야 한다’고 명시한다. 현재 국회에 발의된 상법 개정안 중 11개는 이 대상을 주주의 비례적 이익과 회사를 위하여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개정안대로라면 이사들은 모든 경영 결정을 내릴 때 주주 각각의 이익과 손실을 따져봐야 한다.

재계에선 현실적으로 반영되기 어려운 모호한 조항이라고 반발한다. 주주의 비례적 이익을 공정하게 따지기에는 일반 주주의 범주가 너무 넓다는 것이다. 모든 경영 결정을 내릴 때마다 국민연금·기관투자가·국내외 행동주의 펀드·단기 투자자 등 모든 주주의 비례적 이익을 충족시키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이사들을 상대로 한 빈번한 소송 우려도 제기된다. 단 1주를 가진 주주라도 배당이나 인수합병(M&A), 대형 투자 같은 경영적 판단 때문에 자신이 손해를 입었다고 소송을 제기할 명분이 생기기 때문이다.

개정안의 이사 집중투표제와 감사위원 전원 분리선출도 논란의 중심에 있다. 개정안들엔 자산 2조원 이상 기업이 이사를 선임할 때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하자는 조항이 포함돼 있다. 이사 선임 시 소액주주의 뜻을 반영할 수 있고 이사회 구성의 다양성을 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감사위원을 전원 분리선출하자는 개정안 조항도 비슷한 의도가 담겨 있다. 감사위원이 될 이사를 사내·외 이사와 분리해서 선임하자는 것이다.

재계에선 소액주주의 권한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제안된 이런 제도가 외국계 헤지펀드 같은 투기 세력들이 경영권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악용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2006년 영국계 헤지펀드인 칼 아이칸은 집중투표제를 통해 KT&G 이사 선임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후 경영진 교체 등을 요구하며 경영권 공격에 나섰다. 2018년 미국계 헤지펀드인 엘리엇매니지먼트가 현대차그룹에 집중투표제 도입을 요구한 것도 재계의 우려를 키웠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 명예교수는 “(집중투표제는) 앞서 미국과 일본에서 시행했다가 폐지한 제도로, 주총에서 정치 싸움이 난무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재계와 학계도 이번 상법 개정안의 취지에 대해서는 공감하는 분위기다. 소액주주 보호를 강화할 장치는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들이 대주주 이익을 기준으로 판단한다는 평가가 이어지면 한국 자본시장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지속할 것이란 점을 부인하진 않는다.

하지만 재계는 ‘꼭 개정안과 같이 무리수를 둬야 하느냐’고 되묻는다.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확대하는 안에, 특히 그런 우려가 크다. 한국경제인협회가 지난달 상법을 전공한 전국의 교수(131명)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63%가 이사 충실 의무 확대에 대해 반대했다. 반대 이유는 ‘이미 현행법에 소액주주 보호 조항이 있다’(40%)는 점이었다. 이어 회사법 근간 훼손(27%), 부작용 방지 조항 미비(24%) 등의 이유도 있었다.

전문가들은 부작용 우려가 큰 상법 개정보다 경제 규모에 맞는 평가를 자본시장에서 제대로 받아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증권업계에선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선진지수 편입을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법으로 꼽는다.

한국의 경제 규모는 세계 13위로 선진국 반열에 올랐지만, 현재 한국은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 브라질 같은 신흥시장으로 분류되어 있다. 증권업계는 미국, 캐나다, 일본, 홍콩, 싱가포르 등이 속해 있는 선진시장에 편입되면 최대 61조원의 외국자본이 국내 주식시장에 순유입될 것으로 기대한다.

한국은 경제 규모나 주식시장 규모는 충족하지만, 외국인 투자자에게 폐쇄적이고 공매도 규제 등이 지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점수를 잃고 있다. 한국은 지난해 11월부터 공매도를 금지한 이후 금지 조치가 내년 3월까지 연장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