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먹, 사람 죽일 수 있다" 때려도 맞기만한 복싱 챔피언

허진석의 스포츠 라운지

1982년 6월 30일. 서울 강서구의 종합상가 신축공사장에서 타일공으로 일하던 30대 남성 둘이 관리인을 폭행했다. 일용직으로 일하던 이들은 인력이 남아 자리가 없다는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주먹을 휘둘렀다고 한다. 경찰의 조사 과정에서 관리인이 프로복싱 주니어미들급 동양챔피언을 지낸 ‘KO왕’ 임재근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경찰이 “왜 맞기만 했느냐”고 묻자 그는 “은퇴하면서 주먹을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 저 사람들을 때리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며 가해자들을 선처해 달라고 요청했다.

소림5권, 살수와 거리 먼 건강 체조

1972년 이소룡(왼쪽) 주연 영화 ‘맹룡과강’의 한 장면. 영화에서 보여준 그의 액션은 연기가 아닌 실제 수련한 무술의 결과물이다. [중앙포토]

1972년 이소룡(왼쪽) 주연 영화 ‘맹룡과강’의 한 장면. 영화에서 보여준 그의 액션은 연기가 아닌 실제 수련한 무술의 결과물이다. [중앙포토]

2020년 1월 1일. 서울 광진구의 한 클럽에서 태권도를 전공한 21세 남자 대학생 3명이 23세 남성 1명을 때려 숨지게 했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가해자들이 피해자의 여자친구에게 “함께 놀자”며 팔목을 잡아끌면서 시비가 붙었다고 한다. 가해자들은 피해자를 끌고 나가 폭행했다. 피해자가 정신을 잃고 쓰러진 다음 가해자들은 근처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은 뒤 귀가했다. 피해자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뇌출혈로 사망했다.

가해자들은 살인 혐의로 기소되었다. 법정에서 사건 당일 인근 폐쇄회로(CC)TV가 공개됐다. 피해자는 A씨의 주먹과 발차기를 맞고 쓰러졌고, B씨는 쓰러진 피해자의 얼굴을 걷어찼다. 재판부가 경위를 묻자 A씨는 “태권도를 하다 보니 습관적으로 발차기를 했다”고 진술했다. 재판부가 “거리를 두고 정확히 목표를 정해 가격한 것인가. 조준해서 찬 것인가”라고 질문하자 A씨는 “그렇다”고 답했다.

주먹이든 발차기든 운동을 한 사람의 동작은 ‘습관적’이다. 반복해서 훈련한 동작은 뇌가 지식으로 정제해 기억 속에 저장하기 이전에 근육에 새겨진다. 어릴 때 배운 자전거를 오랜 시간이 지나도 다시 탈 수 있는 것은 이 머슬 메모리(Muscle memory)의 결과다. 당시 임재근은 은퇴한 지 3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클럽의 살인자들은 대학에서 태권도를 전공했다. 복싱이든 태권도든 무술은 살상의 기술이다. 단련한 사람에게 맞으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


1980년대 미국의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에는 동양 무술을 희화화한 장면이 자주 등장했다. 주로 활극영화들인데, 예를 들면 이렇다. 악당이 “아비요~!”를 외치며 여러 가지 무술의 기본동작을 해 보이며 주인공을 위협한다. 악당은 대개 우두머리의 이름 없는 졸개로, 보통은 동양 사람이다. 주인공은 그 꼴을 바라보다 뚜벅뚜벅 다가가 주먹 한 방을 날린다. 악당은 허무하게 푹 쓰러져 정신을 잃는다. 할리우드의 무례와 오만이다.

우리는 스포츠나 체육이 서양에서 시작되었거나 그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스포츠 종목 가운데 상당수가 동양에서 시작되었거나 먼저 성행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수없이 많다. 체육학자 하워드 크누켄은 여러 고고학적 증거를 들어 예수 탄생 이전에 체계화된 스포츠가 중국에 존재했음을 논증했다. 3400년 전에 그려졌으리라고 추정되는 윈난성 창위안의 벽화는 동시대인들의 다양한 신체활동을 표현했다.

2024 파리 올림픽 유도 경기 장면. 유도는 상대를 타격하지 않고 넘어뜨리거나 움직이지 못하게 제압하는 무도이다. [뉴시스]

2024 파리 올림픽 유도 경기 장면. 유도는 상대를 타격하지 않고 넘어뜨리거나 움직이지 못하게 제압하는 무도이다. [뉴시스]

오늘날 중국의 무술은 우슈(武術)로 불린다. 하지만 이보다 더 이른 시기에는 군인으로서의 용맹함을 나타내는 우용(武勇) 또는 전투기술을 뜻하는 우이(武技)라고 불렀다. 이러한 기술들은 단순한 격투기나 군사기술에 머무르지 않는다. 음·양으로 집약되는 중국 철학의 다양한 요소들을 반영했다. 그 결과 인간 존재의 육체적 측면과 철학적 측면을 고루 살핀 무예 체계로 형상화되었다.

중국 무술의 존재를 서양에 대중적으로 알린 인물은 영화배우 이소룡이다. 본명은 리전판(李振藩), 영어이름은 브루스 리.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그는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영향력이 큰 무술가이자 문화적 아이콘이 되었다. 영화에서 그가 보여주는 액션은 연기가 아니다. 그가 수련한 무술의 결과물이다. 이소룡이 요절한 다음 중국 무술은 쿵푸로 대변되고, 이는 곧 소림사(少林寺)라는 사찰로 직결되었다. 하지만 이소룡의 권법은 소림사와 직접 관련이 없다.

소림사는 중국 허난성에 있다. 서기 496년 북위의 효문제가 인도 승려 발타를 위하여 창건했다. 달마가 좌선했다는 전설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소림사를 진실로 유명하게 만든 소재는 무술이다. 달마가 수행자들의 건강을 돌보기 위해 용·호랑이·표범·뱀·학 등의 움직임을 본떠서 만든 것이 소림5권이다. 그러니까 일종의 건강 체조. 맞았다가는 피를 토하며 목숨을 잃는 살수(殺手)와는 거리가 멀다.

서양 격투기의 역사는 신화시대로 소급된다. 제우스는 올림푸스의 패권을 놓고 아버지 크로노스와 레슬링 한 판을 겨뤘다. 복싱은 아폴로가 아레스와 싸워 이긴 다음 승리를 기념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는 그리스 병사들이 복싱 하는 대목이 나온다. 기원전 496년에 열린 고대 올림픽에서는 경기를 하다 선수가 죽자 이긴 선수의 우승 자격을 박탈했다는 기록이 있다. 복싱은 2500년 전에도 위험한 운동이었다.

무술은 스승에게서 제자로 이어지는 전승(傳承)의 스포츠다. 무술을 다룬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항상 제자가 스승을 찾아가 배운다. 스승은 교육에 앞서 혹독한 노동과 수모를 강요한다. 무술이 기술이 아니라 인격의 기초 위에 서야 함을 새기게 하려는 것이다. 마음의 기초 위에 기술의 집을 지었다면 삶을 지키는 선업(善業)이 된다. 임재근에게도, 클럽의 살인자들에게도 스승이 있었을 것이다.

잔혹한 가치관 심는 어둠의 영역 있어

고대 그리스인들의 권투 경기 장면을 보여주는 기원전 336년 도자기 그림. 권투 경기 도중 사망자가 나올 정도로 격렬했다고 한다. [사진 대영박물관]

고대 그리스인들의 권투 경기 장면을 보여주는 기원전 336년 도자기 그림. 권투 경기 도중 사망자가 나올 정도로 격렬했다고 한다. [사진 대영박물관]

왕년의 챔피언은 부당한 폭력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의 복싱이 어디에 기초했는지를 보여준다. 1973년 프로에 데뷔한 임재근은 천일체육관에서 훈련했다. 스승은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낸 ‘권성(拳聖)’ 송순천이다. 체육사학자 박기동은 논문 『복싱인 송순천의 생애사』에서, 송순천이 ‘사회의 여러 유혹에도 굴하지 않았으며, 화낼 줄 모르는 온화한 성품으로 체육군자의 삶을 살았다’고 정리했다.

‘클럽 살인’이 언론에 보도된 다음날, 소속대학의 총장이 태권도부 사범들을 불렀다. 사범들은 “문제 학생들은 최근 특기생 자격을 반납한 ‘일반학생’이다. 태권도부와 관계없다”고 잡아뗐다고 한다. 학교에서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고 사과도 하지 않았다. 교명(校名)이 언론에 드러나지 않도록 감추는 데만 홍보 역량을 집중했다고 한다. 사범들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교직생활을 이어갔다. 나중에 이 학교 교수에게 들은 말이 있다.

“여러 해 전에도 태권도부 아이들이 여의도 호프집에서 다른 손님을 때려 숨지게 한 사건이 있다. CCTV도 없던 시절이니 누가 때렸는지 어찌 알겠나. 경찰도 못 찾아냈다. 그 친구는 무사히 졸업해서 지금 직장생활 잘하고 있다.”

살인 기술을 가르쳤을 사범은 없다. 하나 ‘특기생이 아니니 내 제자가 아니다’라는 불인(不仁), ‘검거되지 않았으니 무탈하다’는 몰염(沒廉)은 교육의 전당임을 의심하게 만든다. 엘리트 체육이 빈발하는 폭력과 성폭력 등의 일탈을 불식하지 못하는 근본 원인도 여기에 있다. 제도나 시스템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둠의 영역이다. 젊은 살인자들은 잔혹한 가치관을 훈습했을 수밖에 없다. 향을 싼 종이에서는 향내가, 고깃덩이를 싼 종이에서는 피비린내가 난다.

필자는 고등학교 3년 동안 유도를 수련했다. 학교에서 교과 과목으로 가르쳤다. 유도를 배운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띠로 단단히 여민 도복을 어깨에 걸치고 등교할 때는 자부심이 차올랐다. 학교에는 유도부도 있었다. 유도장 벽에 교장선생님의 휘호가 걸렸다. ‘유도는 術(술)이 아니요 道(도)다.’ 우리는 어렸지만 말씀을 이해했다. 유도를 함께 배운 동기 중 한 명은 존경받는 유도사범이 되었다. 그의 제자 세 명이 올해 파리 올림픽에 나갔다.

허진석 한국체육대 교수. 스포츠 기자로 30여 년간 경기장 안팎을 누볐으며 중앙일보 스포츠부장을 지냈다. 2023년 한국시문학상을 수상하고 여러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