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관련 사정에 밝은 복수의 소식통에 따르면 조태열 외교부 장관은 전날 저녁 필립 골드버그 주한 미 대사를 접견해 오전 발표된 ‘한-한 체제’ 등에 대해 설명했다. 조 장관과 골드버그 대사는 계엄 사태 직후인 지난 5일에도 만났는데, 사흘 만에 두 번째로 만난 건 정부여당의 이런 대응 방침에 대해 설명하는 게 주된 이유였을 가능성이 크다.
앞서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한덕수 국무총리와 대국민 공동 담화를 통해 윤 대통령의 ‘질서 있는 조기 퇴진’을 추진하겠다며 “(양 측이)주 1회 이상 정례회동 등을 통해 경제, 외교, 국방 등 시급한 현안을 논의하고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한 총리는 “한·미, 한·미·일, 그리고 우리의 우방과의 신뢰를 유지하는 데 외교부 장관을 중심으로 전 내각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 소식통은 “설명을 들은 골드버그 대사는 이에 대해 ‘(그런 체제가)한국 헌법에 부합한 조치인가’ 등을 물은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또다른 소식통은 “정치권이나 언론 등에서 제기되는 논란이 있는 만큼 이에 대한 의견 교환이 이뤄졌다고 보는 게 자연스러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한-한 체제’에 대해 야권은 헌법 위반이라며 비판하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대통령이 유고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잠시 2선 후퇴시키고 그 권한을 총리와 여당 대표가 행사하겠다는 해괴망측한 내용”이라고 지적했다.
헌법 71조는 “대통령이 궐위되거나 사고로 인해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는 국무총리, 법률이 정한 국무위원의 순서로 그 권한을 대행한다”고 규정한다. 국무총리가 권한을 대행하려 할 때는 사망이나 사임(하야), 파면(헌법재판소의 탄핵안 인용) 같은 궐위나 중대한 질병이나 실종, 구속 상태 등 사고라는 사유가 명확해야 한다. 여당 대표는 권한 대행의 주체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궐위나 사고가 아닌 상황에서 한 총리나 한 대표가 외교적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면서 정상외교를 수행할 자격이 있느냐는 질문이 이어지는 이유다. 특히 외교나 국방 분야의 의사 결정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는 점에서 더 큰 논란이 될 수 있다.
이와 관련, 미 국무부도 중앙일보의 질의에 8일(현지시간) “미국은 국회의 처리 결과 및 추가 조치와 관련된 논의에 주목하고 있다”며 “우리는 헌법에 따라 한국의 민주적 제도와 절차가 완전하고 적절하게 작동할 것을 계속 촉구한다”고 답했다. 전날 윤 대통령 탄핵안이 여당 의원들의 집단 보이콧에 따른 투표 불성립으로 정기국회에서 폐기된 데 대해서도 국무부는 같은 입장을 내놨다.
다만 이번 입장은 “한 총리와 한 대표가 상시적 소통을 통해 경제ㆍ외교ㆍ국방 등 국정 현안을 논의하겠다고 한 것에 대한 미국 정부의 입장은 무엇인가” 등 한-한 체제에 대한 미 정부의 입장을 확인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그런데도 미국이 ‘헌법에 따른 민주주의 작동’을 거듭 촉구한 것은 한-한 체제가 위헌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인식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특히 타국의 국내 정치 상황에 대해서는 언급 자체를 삼가는 게 외교적 관례라는 점에서 미국의 반응은 주목할 만 하다. 실제 주한 중국 대사관은 한-한 체제에 대한 중국의 입장을 묻는 중앙일보 질의에 9일 “한국의 내정에 대해서는 평가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주한 일본 대사관도 이날 "다른 나라의 내정의 대한 코멘트는 삼간다"고 답했다. 반면 미 측은 계엄 국면에서 “형편없는 오판” “심각한 불법” 등 강도높은 비판을 거듭해 왔다.
미국이 이처럼 일련의 상황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이번 계엄이 민주주의의 가치를 위협하는 시도였다는 인식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군을 실제로 움직인 윤 대통령의 독단적 결정이 한·미 연합 방위태세에 미칠 수 있는 악영향을 미국은 더 심각하게 본 것이라고 한 소식통은 설명했다. 그는 “계엄을 빌미로 북한의 도발이나 중국의 공세적 위협이 이뤄졌다면, 이는 당장 주한미군에 대한 위협 증강 요소가 될 수 있다”며 “미국으로선 주한미군 및 가족과 한국 체류 자국민의 생명, 안전에 직결되는 사안인 셈인데, 이를 결정하며 한국이 일언반구 언질도 없었다는 점을 엄중하게 보는 것”이라고 전했다.
실제 계엄 선포 전후로 한국을 대하는 미국의 태도는 온도 차가 크다고 관련 소식통들은 전했다. 미국은 계엄 직후 한·미 핵협의그룹(NCG) 회의와 도상연습(TTX)을 무기한 연기했고,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부 장관은 고별 출장의 성격으로 한·일을 함께 방문하려던 당초 일정을 바꿔 일본만 방문했다. 트럼프 2기를 본격적으로 대비해야 하는 시점에 오히려 외교 자산이 손상돼 타격을 입고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전성훈 전 통일연구원장은 “한국 내부 정리가 신속히 되지 않으면 북한이 오판을 할 수도 있고 자칫 주한미군이 개입될 수 있기 때문에 미국도 우려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재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그간 공들여 복원한 한·미 동맹과 한·미·일 협력 이니셔티브가 격랑 속에 휘말릴 수 있어 미국으로서도 당황스러운 건 사실일 것”이라면서도 “다만 이번 계엄 사태는 윤석열 대통령의 개인적인 일탈로 발생했기 때문에 미국도 불쾌감을 여과없이 드러내기보다는 한국의 유일한 동맹으로서 국내 정치 상황이 원활히 회복되기를 신중히 기다려줘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