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치른 총선을 둘러싼 부정 선거 의혹과 정부의 유럽연합(EU) 가입 협상 중단 선언으로 촉발된 조지아 내 반정부 시위가 대통령 선거를 계기로 확산되고 있다. 이날 야당 지도자들은 EU에 "친러시아 성향의 대통령을 거부해달라"는 공동 서한을 보냈다. 무소속 친유럽 성향인 현 대통령 살로메 주라비슈빌리가 대통령직 이양을 거부하는 등 조지아의 정국 혼돈이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조지아 중앙선거위원회는 이날 대선 결과 '조지아의 꿈' 소속 카벨라슈빌리가 당선됐다고 밝혔다. 집권 여당인 조지아의 꿈은 친러시아 성향이다. 인구 370만 명의 조지아는 1991년 소련에서 분리 독립했으나, 국경을 맞댄 러시아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당초 대통령을 직선제로 뽑아 온 조지아는 개헌을 통해 이번 대선부터 간선제로 바꿨다. 카벨라슈빌리는 국회의원 150명과 같은 수의 지방자치단체 대표들로 구성된 선거인단 300명 중 224명의 표를 얻어 법정 필요 득표수(200표)를 넘었다.
그러나 야당은 "부정 선거로 탄생한 여당 소속의 대통령을 인정할 수 없다"며 "총선과 대선을 다시 실시하는 게 현 위기의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앞서 조지아의 꿈이 승리한 지난 10월 총선엔 부정 선거 의혹이 일었다. 국제 선거 감시 단체들은 총선에서 투표함 조작과 뇌물 거래, 폭력 등 위법 행위가 있었다고 지적했고, 주라비슈빌리 대통령은 러시아 개입 의혹을 제기했다. 그는 의회가 적법하게 구성될 때까지 이달 말 자신의 임기가 끝나도 퇴임하지 않겠다고 맞서고 있다.
조지아는 2020년 의원내각제로 전환한 뒤 대통령은 상징적인 역할만 한다. 때문에 일각에선 결국 카벨라슈빌리 당선인이 친러 성향의 조지아의 꿈에 휘둘리는 '허수아비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관측한다. 카벨라슈빌리는 1990년대 축구 국가대표 출신으로, 영국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시티에서 뛰었다. 2016년 조지아의 꿈에 입당해 지금까지 두 차례 국회의원을 지냈다. 평소 "EU가 조지아의 주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등의 친러적 주장을 해왔다고 알려졌다.
지난 총선 뒤엔 이라클리 코바히제 조지아 총리가 지난달 28일 "EU 가입 협상을 2028년까지 멈추고 EU의 보조금도 받지 않겠다"고 밝혀 여론의 역풍을 맞기도 했다. 조지아 헌법엔 EU 가입이 명시돼 있다. 조지아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2022년부터 EU 가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이어 조지아의 영토를 노릴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당시에도 집권당이었던 조지아의 꿈은 국민 여론을 감안해 EU 가입을 추진하겠다고 했으나 이번 총선 승리 뒤 입장을 바꿔 가입 추진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10여일 연속으로 대규모 시위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번 사태와 관련, EU와 미국 국무부는 조지아 정부를 규탄한 반면, 러시아는 시위대를 비판하는 등 사실상 서방과 러시아 간 대리전 양상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