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일 있냐? 다 묻는다"…뮤지컬 '레베카' 디자이너 제2 인생

무대 디자이너에서 화가의 길까지 개척한 정승호 작가. 개인전이 열리는 중인 갤러리에서 찍은 사진이다. 정승호 작가 제공

무대 디자이너에서 화가의 길까지 개척한 정승호 작가. 개인전이 열리는 중인 갤러리에서 찍은 사진이다. 정승호 작가 제공

"딱 2000점만 그려보자."  
순수미술 작가로 정식 데뷔하기 전, 정승호(57) 씨가 했던 각오다. 그의 이름 석 자는 공연예술계에선 성공을 보장하는 브랜드로 통한다. 뮤지컬 '웃는 남자' '레베카'부터 연극 '벚꽃동산' '갈매기', 가수 이문세ㆍ김동률의 콘서트까지, 성공을 거둔 화제작에 '무대 디자이너'로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그는 지천명을 지난 순간, 평생을 바쳐 일가를 이룬 장르를 잠시 떠나기로 결심했다. 새 인생 출사표를 던지기 위해서다. 어린 시절부터 꿈꿨지만,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이루지 못했던 화가의 길이다.  

쉬울 리는 없었다. 우선 열과 성을 다해 많이 그리자고 생각했다. 물감과 페인트를 켜켜이 쌓고, 굳으면 다시 깎아내는 과정을 거치기에 한 점 완성에 6~7개월이나 걸리지만 그럼에도 2000점이란 큰 목표를 설정했던 까닭이다. 진심을 담은 꾸준함을 이기는 것은 없다. 2000점을 다 채우기도 전,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개인전을 열게 됐다. 내년 12일까지 헬렌앤제이 갤러리에서 열린다. '정 감독'에서 '정 작가'로 거듭난 그를 지난 17일 갤러리에서 만났다.  

정승호 작가의 작품, '숨쉬는 그림자.' 정승호 작가 제공

정승호 작가의 작품, '숨쉬는 그림자.' 정승호 작가 제공

 
그는 "매일 새벽 6시면 학교(서울예대)에 도착해 강의 시작 전 그림을 그리곤 했다"며 "몸은 힘든데 만나는 사람마다 '무슨 좋은 일 있냐'고 묻더라"며 웃었다. "공동 작업인 무대 예술도 즐겁고 의미는 있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는 공허함이 있었다"며 "반면 순수미술은 나 홀로 몰입하고, 내가 그 시작과 끝을 정할 수 있고 그 결과도 남는다는 점에서 새로웠다"라고도 설명했다.  

정승호 작가의 작업은 페인트와 각종 재료를 섞어 굳혔다가 다시 깎아내는 작업을 거친다. 정승호 작가 제공

정승호 작가의 작업은 페인트와 각종 재료를 섞어 굳혔다가 다시 깎아내는 작업을 거친다. 정승호 작가 제공

 
이번 전시회에선 회화를 기반으로 조소 및 설치 요소를 가미한 56점이 관람객을 맞는다. 재료엔 무대 디자인을 하며 해왔던 고민이 녹아있다. 바다에 떠다니던 나무 조각, 산책로에서 담아온 낙엽, 수명을 다한 빨래판 등을 가져다가, 숯가루 또는 페인트·흑연 등으로 새로운 질감과 색을 입혔다. 버려진 것을 활용해 새로움으로 탄생시켰다. 그는 "화려한 무대가 끝나고 나면 버려지는 것들이 안타까웠다"며 "쓰레기라고 치부되는 것에도 새로움이 깃들 수 있다고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전시 제목 '숨결에 대한 시선'에 대해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숨을 쉬고 있고, 숨을 쉬지 않으면 죽으면서도 정작 그 숨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며 "인간이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근원적 본질을 들여다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작품엔 크고 작은 미니어처 인간 조각이 붙여져 있는데, 이에 대해 그는 "결국 누구나 혼자인 인간의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정승호 작가의 작품 '숨 #16.' 정승호 작가 제공

정승호 작가의 작품 '숨 #16.' 정승호 작가 제공

 
어린 시절부터 화가를 꿈꿨지만 고교 시절 갑자기 집에 빨간 딱지가 붙으면서 미술학원은 언감생심이 됐다. 잠시 배우를 꿈꾸기도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돈을 벌기 위해 무대 제작 아르바이트를 우연히 하면서 그 길을 택했다. 그는 "삶의 고비마다 귀인들을 만났다"며 "유학 시절 IMF가 터졌는데 교수님이 장학금을 주셔서 학업도 마칠 수 있었고, 공연계에서도 좋은 분들을 만나 훌륭한 작품들을 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화가로서의 각오와 계획을 물었다. 그는 "처음엔 전공자가 아니니, 다작을 해야만 나만의 것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작업을 하다 보니 결국 나의 내면을 파고들어 가는 과정이 중요하더라"고 말했다. 이어 "뭔가를 이뤄내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그저 열심히 그리면서 나를 마주하고, 그 결과를 계속 보여드리고 싶다"며 "그렇게 되면 무대 디자이너로서도 더 성숙해지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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