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현빈은 독립투사 안중근 장군을 연기한 영화 '하얼빈'에 대해 "데뷔 후 21년간 해 온 어떤 영화와도 달랐다. 압박감이 상당했다"고 말했다. 사진 CJ ENM
“꼬레아 우라(Корея! Ура)!”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기차역,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한 일제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암살됐다. 러시아군이 주둔한 현장에서 총격과 함께 러시아어로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짖은 이는 당시 갓 서른의 안중근(1879~1910) 대한의군 참모중장. 배우 현빈(42)의 신작 ‘하얼빈’(24일 개봉)은 바로 이 장면을 향해 나아가는 영화다.
‘내부자들’(2015) ‘남산의 부장들’(2020) 등 한국 현대사의 비판적 해부도를 스크린에 새겨온 우민호 감독이 안중근 장군과 독립투사들의 의거를 만주 대자연 속에 장엄한 회화처럼 그려냈다. 이국땅에서 단지동맹(斷指同盟)의 결의로 뭉친 독립투사들의 고독한 심리적 풍경화에 가깝다. 일본 배우 릴리 프랭키(칸 황금종려상 수상작 ‘어느 가족’ 출연 배우)가 맡은 이토 히로부미의 비중도 그리 크지 않다.
순제작비 265억원(손익분기점 650만 관객)의 상업 대작으론 드문 미학적 도전이다. 천만영화 ‘서울의 봄’을 만든 제작사 하이브미디어코프가 제작했다.
영화 '하얼빈' 주연 배우 현빈을 19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만났다. “제 아이가 이 영화와 거의 같이 태어났다. 나중에 아이가 크면 ‘하얼빈’도 보여줄 것”이라는 그는 “아이를 생각하면 더 나은 미래가 와야 하고 (아버지로서) 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진 CJ ENM
처음엔 “안중근 장군의 존재감과 상징성” 탓에 주연 제안을 거절한 현빈도 “우 감독의 시나리오를 보며 어느 순간 궁금해졌”단다. 지난 19일 서울 삼청동에서 만난 그는 “연기자로서 이렇게 훌륭한 인물을 연기할 기회가 또 올까 싶었다”고 돌아봤다.
아내인 배우 손예진과 결혼 계기가 된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2019~2020, tvN) 등 일본에서도 인기 있는 한류스타 현빈의 항일영화 출연은 의외로 비칠지 모른다. 정작 본인은 그리 개의치 않는 눈치. 배우 데뷔 전 경찰대 진학을 꿈꿨고, 전성기였던 2011년 해병대에 자원 입대한 그는 안중근 장군의 “군인으로서 신념”에 깊이 매료된 듯 보였다.
“서른이란 나이에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하셨을까” 하고 운을 뗀 그는 어린 삼남매를 둔 ‘아버지’ 안중근의 용단도 남다르게 봤다. “한 가정의 가장이 되고 보니 더 힘든 일이었을 것 같다”면서다. 현빈은 ‘하얼빈’ 촬영이 시작됐던 2022년 11월 첫 아들을 얻었다.
현빈 오열 터진 그 장면, 이토 저격신 아니었다
영화 '하얼빈'에서 안중근 장군이 홀로 얼어붙은 대동강을 헤매는 장면은 실제 상황이 아니라, 그의 내면 풍경을 형상화한 장면이다. 영하 40도 강추위에 두텁게 언 몽골 홉스골 호수에서 촬영했다. 사진 CJ ENM
‘하얼빈’ 속 인물 묘사는 극도로 건조하다. 독립군 중 밀정의 정체를 찾는 과정이 서스펜스를 불어넣는 정도다. 극 초반 신아산 전투신, 하얼빈역 장면을 제외하면 영화 속 공간 대부분이 흡사 연극 무대처럼 인적 없이 비어있다.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극도의 절제 속에 우 감독이 의지한 건 현빈의 눈빛이었다. 그 눈빛에서 그는 “쓸쓸함과 연약함, 강함”을 읽어냈다. 그런 안중근을 “숭고하게 그리고자” 현빈을 캐스팅했다.
영화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얼어붙은 대동강 장면이 대표적 예다. 거미줄처럼 실금이 얽힌 강 표면을 고행하는 순교자처럼 홀로 걷는 안중근 장군의 모습은 실제 상황이 아니라 그의 결연한 내면을 형상화한 장면. 이 영화의 주제나 다름없는 이미지다.
그 무게가 오롯이 현빈의 몫이었다. “매일 같이 관련 책과 자료들, 기념관에 가서 그분의 발자취를 연구하고 상상했다”는 그는 압박감이 상당했다고 털어놨다. 촬영 마지막 날 갑자기 터진 오열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동안 계속됐어요. 터졌다가, 사그라졌다가…, 하루 종일 반복했죠. 어깨 위에 있던 뭔가가 훅 떨어지는 기분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 그에게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 암살 장면보다 더 여운이 길었던 순간들은 따로 있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온 국민이 아는 위인이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했나.
“이 영화 전까진 거사와 재판 결과까지만 알았지, 세세한 건 몰랐다. 어렸을 때부터 일대기나 자료를 보면서 ‘빈 공간’을 찾으려 노력했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 인간적인 좌절은 없었을까.”
-영화를 통해 고난의 여정을 그대로 되밟아본 소감은.
“시원한 한방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잖나. 하얼빈 거사가 있고 36년 후에야 나라를 되찾았다. 절대 블루스크린(컴퓨터그래픽(CG) 촬영용 세트장) 앞에서 쉽게 찍을 수 없다는 각오로 진심을 다했다.”
"팬티 안까지 진흙 범벅…정신적 압박 더 컸죠"
2022년 겨울 최고 40cm 폭설이 내린 광주에서 촬영한 신아산 전투신. 지난 9월 ‘하얼빈’을 최초 공개한 캐나다 토론토국제영화제 현지에서 현빈은 “인간과 자연의 싸움을 그린 영화 ‘레버넌트’(2015)”도 참고한 작품으로 언급했다. '하얼빈'은 '기생충' '곡성' '설국열차' 등으로 유명한 홍경표 촬영감독이 촬영했다. 사진 CJ ENM
-몽골, 라트비아, 한국 등 3개국 로케이션을 진행했다. 대동강 장면은 영하 40도 강추위에 얼어붙은 호수에서 드론 촬영했다고.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차로 16시간 떨어진 홉스골 호수다. 끝없는 얼음밭에 혼자 있으니 공포감이 엄습했다. 발밑으로 두꺼운 얼음 깊은 곳이 깨졌다가, 붙었다가 하는 소리가 났다. 할리우드 전문팀(‘007’ ‘미션 임파서블’ 등)의 드론 촬영이 준비되길 몇 시간씩 기다려 단 몇 분 찍기를 반복했다. 무섭고, 외롭고, 온갖 감정이 느껴졌다. 그게 좋았다.”
-광주에서 신아산 전투신을 찍을 땐 예기치 못한 폭설도 내렸다.
“눈 쌓인 산에서 뒹굴다보니 진흙밭이 됐다. 단순한 액션이 아니라 처절한 몸부림처럼 보이려고 무술팀과 수정을 거듭했다. 팬티 안까지 진흙이 들어갈 정도였지만, 정신적 압박이 셌던 상황이라 신체적으로 힘들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영화 '하얼빈' 내내 절제한 연기를 펼친 현빈은 가장 감정을 폭발한 장면으로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유재명)과 거사 직전 안가에 있던 순간을 꼽았다. "안중근 장군이 늘 진두지휘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어딘가 숨고 싶고 외로운 감정이 있지 않았을까. 빛이 없는 구석에 쭈그려 앉으면 어떨지 제안 드렸고, 감독님이 흔쾌히 동의했다. 연기하면서도 먹먹했다"고 그는 돌아봤다. 사진 CJ ENM
“클로즈업이 아닌 부감(위에서 내려다본 전경 쇼트)으로 땄다. 워낙 알려진 장면이라 감독님이 담백하게 찍고 싶어 했다.”
“올가미가 씌워지기 전 두려움과 동시에 남겨두고 가는 동지들에 대한 미안함이 들었다. 마지막 촬영이었는데, 끝나고 거의 오열했다.”
뜻밖에 시국 저격 "아이 생각하면 더 나은 미래 와야"
영화 '하얼빈' 속 독립군 거사 이후 36년이 지나서야 광복이 찾아온다. 현빈(왼쪽)은 ″지나서 보면 (독립의) 목적을 달성했지만, 당시 독립군들은 성공 여부를 알 수 없는 여정의 시작에 나섰다″면서 ″힘을 모아 한 발 한 발 내딛으면 더 나은 내일이 있을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현 시국을 암시하는 발언도 했다. 사진 CJ ENM
영화 후반 “불빛을 들고 나가야 한다”는 그의 내레이션은 실제 안중근 장군의 말을 인용해 만든 것. 극중 이토 히로부미가 “이 나라 백성들은 국난 때마다 이상한 힘을 발휘한다”고 하는 대사와 함께 비상계엄 시국을 떠올리게 한다는 반응도 나온다. 지난 9월 토론토국제영화제(갈라 프레젠테이션 부문)에서 최초 공개됐을 때도 있던 대사다.
전날 ‘하얼빈’ 언론시사 후 간담회에서 “힘을 모아 한 발 한 발 내딛으면 더 나은 내일이 있을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시국 암시 발언을 한 현빈은 19일 “아이를 생각하면 더 나은 미래가 와야 하고 (아버지로서) 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자라면 ‘하얼빈’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차기작도 우민호 감독과 1970년대로 간다. 내년 출시될 디즈니+ 오리지널 드라마 ‘메이드 인 코리아’에서 부와 권력을 욕망하는 백기태 역을 맡아, 그에 맞선 검사 역의 정우성과 호흡 맞출 예정이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