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총재는 2일 기자실을 찾아 “최 대행이 비난을 무릅쓰고 어려운 결정을 했다”며 “공직자로서 나중에 굉장히 크게 평가받을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 대행을 비난만 할 게 아니라 정부가 계속 탄핵 위협 가운데 작동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며 “이제 사령탑이 탄핵될 위험은 굉장히 줄어든 만큼 여야정협의를 통해 경제를 안정시킬 토대가 마련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총재는 해외에서 한국 경제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면서 더이상 최 대행 체제가 흔들려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해외에서 한국이 단기적으로 대응을 잘해 외환ㆍ금융시장을 안정시켰다는 단계는 넘어가버렸고 이제는 대통령ㆍ국무총리 탄핵 이후 과연 정부가 잘 작동할지를 보고 있다”며 “정치리스크에 따라 국가신용등급이 내려갈 수 있는데 이건 한번 내려가면 다시 올라가기가 굉장히 어렵다. 오랜 기간이 걸리고 코스트(비용)가 너무 크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통화·재정 정책만으로 경제성장을 뒷받침할 수 없다며 구조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등 과거 한은 총재의 역할을 뛰어넘는 언행을 해왔다. 12ㆍ3 비상계엄 사태 이후 경제 상황이 엄중해지고 줄곧 손발을 맞춰온 최상목 경제부총리의 역할이 커지면서 더 적극적으로 국정운영에 대한 조언을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총재가 최 권한대행을 공개적으로 변호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12월10일 한은을 찾은 야당 기재위원들이 윤석열 대통령의 내란 혐의 관련해 “최상목도 수사대상 아니냐”며 국무위원 책임론을 제기했다. 그러자 이 총재는 “계엄 선포 전 열린 국무회의에서 (최 권한대행이) 계엄에 반대해 자리를 박차고 나왔고, 이후 F4회의에서는 계엄을 막지 못한 책임감에 사표를 내겠다고 했지만 제가 만류했다”는 뒷얘기를 전하며 그를 옹호했다.
이 총재와 최 권한대행의 각별한 관계도 새삼 주목받고 있다. 두 사람은 ‘경제 투톱’으로 매주 F4 회의(거시경제ㆍ금융현안간담회)를 통해 경제 현안을 점검하고 정책을 조율하는 등 ‘파트너십’을 쌓아왔다. 또 F4회의와는 별개로 여야정 비상경제협의체 가동 등 주요 경제 현안과 관련해선 수시로 소통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9월에는 한은 총재로서는 처음으로 기획재정부를 방문해 구조 개혁 방안 등을 논의하기도 했다.
이 총재는 이날 신년사를 통해서도 “정치적 이해 관계에 따라 평가가 다르겠지만, 최 권한대행이 대외 신인도 하락과 국정 공백 상황을 막기 위해 정치보다는 경제를 고려해 어렵지만 불가피한 결정을 했다”며 “이는 앞으로 우리 경제 시스템이 정치 프로세스와 독립적으로 정상 작동할 것임을 대내외 알리는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여야가 국정 사령탑이 안정되도록 협력해야 할 때”라며 “이 과정에서 한국은행도 풍랑 속에서 중심을 잡고 정부 정책에 조언하며 대외 신인도를 지켜내는 방파제 역할을 다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총재는 한국 경제의 불확실성이 커진 만큼 통화정책도 유연하고 기민하게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이 총재는 “전례없이 정치ㆍ경제적 불확실성이 커진 만큼 통화정책은 상황 변화에 맞추어 유연하고 기민하게 운영될 필요가 있다”며 “물가, 성장, 환율, 가계부채 등 정책변수 간 상충이 확대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데이터를 바탕으로 금리 인하 속도를 유연하게 결정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이 금리 인하 속도를 늦추겠다고 하는 만큼 한국도 경기부양을 위한 과감한 금리 인하가 어려운 상황임을 고려한 발언으로 해석된다. 이 총재는 “2%를 밑도는 성장률의 절대 수준만을 과거와 비교하면서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을 고통을 줄여주는 진통제로만 사용한다면 부작용이 커질 수 있다”며 구조개혁 필요성을 재차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