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중앙일보가 5일 현지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은 물론 공화당이 사실상 당론으로 반대해온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반도체과학법(칩스법)의 표결 결과를 분석한 결과, 한국 기업이 투자한 지역의 공화당 의원 중 칩스법에 찬성했던 인사 중 상당수가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것으로 나타났다.
권력에서 밀려난 ‘친한파’ 의원들의 자리는 대부분 초강경파들로 채워졌다. 한국 기업들이 IRA와 칩스법을 통한 보조금을 발판 삼아 대규모 대미(對美) 투자를 결정했다는 점에서, 더 강경해진 공화당 우위의 ‘레드 웨이브(red wave)’ 의회의 출범은 리더십 공백에 직면한 한국에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韓투자 상원 46% ‘칩스법 반란’ 동참
본지가 입수한 산업통상자원부의 ‘주요 대미 투자 현황’에 따르면 한국의 주요 대미 투자기업 16개는 미국 20개 주(州) 24곳에 생산시설을 두고 있거나 건설을 계획하고 있다. 기업들은 2022년 IRA와 칩스법이 통과된 뒤 544억 달러(약 80조원)의 투자를 결정했다. 1985년 이후 총투자액 977억 달러(약 143조원)의 55.7%가 지난 2년여 사이에 결정됐다.
두 법은 공화당이 반대했던 법이다. IRA 표결에선 이탈표가 나오지 않았다. 반면 칩스법의 경우 공화당 하원의원 24명과 상원 16명이 당의 입장과 달리 찬성 표결을 했다. 당론 이탈 비율은 11.3%, 상원은 32%였다. 여기엔 한국 기업의 투자를 받은 주의 상원의원 6명이 포함돼 있다. 당시 표결에 참여했던 13명 공화당 의원을 기준으로 한국이 투자한 곳의 칩스법 찬성 비율은 46.1%에 달했다.
미국 정치를 분석해온 장성관 컨설턴트는 “공화당 일부의 찬성은 공식적으로는 바이든 정부가 대중국 견제를 위한 공급망 확보를 내세워 설득한 결과”라면서도 “한국 기업을 유치한 곳의 상원의원들이 눈에 띄게 찬성 투표에 가담한 것은 지역구에서 일자리를 창출하는 등 한국 기업의 역할을 의식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칩스법 찬성’ 6명…줄줄이 ‘후퇴’
그런데 한국 기업의 투자를 가능하게 했던 이들 6명의 공화당 의원들 중 5명이 트럼프 2기 출범을 앞두고 권력에서 밀려났다. 한국의 입장에선 우군을 잃은 셈이다.
또 민주당 척 슈머 상원 원내대표와 함께 칩스법을 공동 발의했던 토드 영(인디애나) 상원의원은 대선 과정에서 ‘트럼프 비토’ 행렬에 동참하면서 눈밖에 났다는 평가를 받는다. 삼성SDI의 배터리 공장이 건설 중인 인디애나의 주도권은 이번 선거에서 트럼프의 강력한 지지를 받으며 하원에서 상원으로 ‘승격’한 강경파 짐 뱅크스 상원의원이 쥐게 될 가능성이 있다. 빌 캐시디(루이지애나) 상원의원은 트럼프 탄핵 심판 당시 찬성파로 불린다.
LG전자·SK온·한국타이어 등 다수 기업이 위치한 테네시의 빌 해거티 상원의원의 경우 상무장관 후보로 거론됐지만, 트럼프는 그의 이름을 호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트럼프의 핵심 인사이자 주요 관리 대상으로 분류된다. 린지 그레이엄(사우스캐롤라이나) 상원의원만 유일하게 친 트럼프 성향을 유지하고 있다.
韓투자 지역 곳곳엔 공략 대상 ‘키맨’ 배치
한국에 우호적이던 민주당 상원의원 일부도 공화당 후보에게 패하며 트럼프의 측근들로 교체됐다. 다만 이에 대해선 위기인 동시에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전망이 함께 나온다.
LG에너지솔루션이 투자한 오하이오에선 민주당 셔로드 브라운 의원이, SK팜테코가 투자한 펜실베이니아에선 밥 케이시 의원이 각각 공화당의 버니 모레노와 데이비드 매코믹에게 패했다. 상원의원이 된 두 사람 모두 트럼프의 강한 지지를 받는 사업가 출신이다.
스테판 슈미트 아이오와 주립대 명예교수는 “강경파의 배치는 당장은 악재”라면서도 “그러나 상원의원은 지역구의 이해관계를 최우선으로 삼고, 특히 사업가 출신이라면 지역구 기업의 요구를 우선 순위에 놓고 트럼프와 맞설 수 있기 때문에 한국의 입장에선 트럼프에게 영향을 줄 강력한 동맹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들 외에도 한국 기업이 위치한 지역의 하원엔 트럼프에게 영향을 미칠 ‘키맨’들이 다수 배치돼 있다.
오하이오의 마크 터너 의원은 하원 정보위원장이다. 그는 한국 기업의 투자를 받은 지역의 공화당 하원의원 중 유일하게 칩스법에 찬성했다. 또 “법에 맞춰 투자한 기업은 인정해야 한다”며 칩스법 유지를 주장해온 켄터키의 브렛 거스리 하원의원은 하원 에너지·상무위원장이 됐다. 테네시의 마크 그린 하원의원도 트럼프의 핵심 정책인 이민문제를 다루는 하원 국토교통위원장을 맡고 있다.
기업 ‘독자 생존’ 모색…“초당적 ‘보텀업’ 의원 외교 시급”
기업들은 자체적으로 공화당 의원 공략에 나섰다. 미국에 투자를 진행하고 있는 기업 관계자는 “보조금을 전제로 부지 공사와 인력 확충까지 끝낸 상태에서 지원이 사라지거나 축소될 경우 타격이 불가피할 것”이라며 “기업들이 의회가 있는 워싱턴에 대관 기능을 집중한 것은 생존 전략이고, 특히 지역구 의원 중 상원은 최우선 공략 대상”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9일 방미한 신학철 LG화학 부회장 역시 LG가 대규모로 투자한 테네시의 마샤 블랙번, 빌 해거티 상원의원부터 만났다. 블랙번은 트럼프 1기의 인수위 부위원장을 지냈던 핵심으로, 칩스법 표결에선 반대표를 던졌다. 블랙번 의원은 ‘칩스법에 반대했던 이유’를 묻는 본지의 질문에 “테네시엔 최고의 인적자원이 있고, 주세(州稅)가 없다”면서도 표결에 대해선 답하지 않았다.
트럼프 1기 때 대미 경제 정책을 주도했던 여한구 전 통상교섭본부장은 본지에 “2017년 트럼프가 한·미 FTA를 파기하려고 했을 때 초당적 의원단이 공화당 의원들을 공략해 트럼프에게 영향력을 발휘하게 했다”며 “리더십 공백에 직면한 현재 상황에서 미국의 의원들을 통해 트럼프를 움직이는 ‘보텀업(bottom up)’ 방식의 의원 외교가 큰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여 전 본부장은 이어 “특히 한국은 제1의 대미 직접 투자국이 됐을 정도로 한국 기업의 투자가 미국의 지역 경제에 직접적 영향을 주고 있다”며 “기업의 투자를 레버리지로 삼아 국회의원들이 공화당 내 영향력이 큰 인사들을 초당적으로 공략하는 것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국회가 국익에 기여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자 시급한 의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