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석유' 트럼프 돌아왔다…국내 정유, 미소 속에 비친 그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AF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AFP=연합뉴스

“드릴, 베이비, 드릴(drill, baby, drill)”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20일(현지시간) 취임사를 통해 외친 이 구호는 ‘화석 연료’로의 귀환을 상징하고 있다. 공급 확대로 유가가 내려가면 주춤하는 국내 정유업계엔 호재로 작용할 것으로 기대된다. 다만 트럼프 1기 행정부를 돌아보면 오히려 미·중 무역분쟁에 따른 수요 위축으로 타격을 입었던 만큼 불확실성 확대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23일 업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직후 ‘국가 에너지 비상상태’를 선포한 뒤 “우리는 지구 상의 어떤 국가보다 많은 양의 석유와 가스를 보유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사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파리기후협정을 탈퇴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바이든 행정부의 친환경 정책을 지우고, 화석 연료 중심으로 에너지 정책을 새롭게 짜겠다는 의미다.

이는 국내 정유업계에겐 새로운 기회로 여겨진다. 석유 생산이 확대돼 유가가 하락하면 정유사들은 낮은 가격으로 원유를 들여와 정제마진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제마진은 제품 가격에서 원료비·수송비 등을 제외한 가격을 의미한다. 미국에너지정보청(EIA)은 공급 과잉 등으로 브렌트유 가격이 올해 평균 74달러에서 내년 66달러로 약 10% 가량 떨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권덕민 신영증권 연구원은 “미국은 화석연료를 제한 없이 생산할 가능성이 크다”며 “석유, 석탄 등의 화석연료 생산량 증가를 가정하면 국제 에너지 가격이 하락할 것으로 예상되며, 이로 인해 국내 기업 중 에너지 가격 변동을 많이 받는 업체들의 수혜가 예상된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미중 무역갈등 심화 등으로 인해 글로벌 수요가 위축되면 이같은 호재가 상쇄될 수 있다는 점이다. 2017년 출범한 트럼프 1기 행정부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기후협약을 탈퇴하고 화석 연료 정책을 확대했지만, 보호 무역주의 강화로 글로벌 물동량이 줄어들면서 수요는 위축됐다. 익명을 원한 업계 관계자는 “유가가 떨어진다고 무조건 정제마진이 커지는 것은 아니고, 결국 수요가 뒷받침해줘야 한다”며 “트럼프 1기 당시에도 정유사들의 실적은 좋지 않았다. 2기도 마찬가지로 수요가 확대되지 않으면 정유사들엔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실제 2017년부터 2020년까지 국내 정유4사(SK이노베이션·GS칼텍스·에쓰오일·HD현대오일뱅크)의 영업손익은 일제히 우하향했다. 대표적으로 SK이노베이션은 2017년 3조2343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렸지만, 2018년 2조1202억원, 2019년 1조2812억원으로 매년 급감했다. 같은 기간 GS칼텍스(2조16억원→8797억원), 에쓰오일(1조3733억원→4201억원), HD현대오일뱅크(1조1378억원→5220억원) 등 다른 정유사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2020년엔 코로나 팬데믹까지 겹치며 정유4사 모두 적자로 전환됐다.

조철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원유 가격이 떨어지면 어느 정도 수혜를 입을 수 있지만, 관세 장벽이 올라가면서 보호무역주의가 강화되는 데 따른 마이너스 영향도 적지 않을 것”이라며 “미국에서 화석 연료 생산이 확대되는 만큼 오히려 글로벌 경쟁이 치열해질 우려도 있다”고 말했다.

결국 트럼프 행정부의 에너지 정책과 별개로 지속가능항공유(SAF) 등 탈탄소·친환경 투자는 이어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SK이노베이션은 최근 국내 정유업계 최초로 유럽에 SAF를 수출했고, GS칼텍스도 국제선 노선에 대한 SAF 공급을 확대하고 있다. HD현대오일뱅크도 지난해 6월 일본 ANA 항공사에 SAF를 수출했다. 업계 관계자는 “탈탄소는 이미 거스를 수 없는 세계적 흐름인 만큼 꾸준히 나아가야 한다”며 “SAF 생산에 대한 세액공제 등 정부의 정책적 지원이 강화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