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시절에 어두운 돈 왜 먹나" 조합 위로금 횡령 담합에 분노 [김성칠의 해방일기(4)]

 
김성칠 교수의 일기는 1993년 〈역사앞에서〉란 제목으로 창비에서 출간되었다. 이 일기는 1945년 11월 29일자 뒤쪽부터 남아있었는데, 그 앞의 일기가 사라진 것으로 보였다. 유물을 보관하고 있던 필자의 아들 김기목 교수(통계학, 전 고려대)가 사라진 줄 알았던 일기를 최근 찾아냈다. 1945년 8월 16일에서 11월 29일(앞쪽)까지 들어 있다. 중앙일보는 이 일기를 매주 토요일 원본 이미지를 곁들여 연재한다. 필자의 다른 아들 김기협 박사(역사학)가 필요한 곳에 간략한 설명을 붙인다.  

9월 1일 흐리고 밤에 비오다.

저금 내어주기에 몹시 바빴다.

박대규 군과 함께 무궁화를 심었다. 200 본이 거진 될 것이다. 내년 봄에는 “형제여 자매여 무궁화 묘종을 나눠드립니다. 가져다 고이고이 기르십시오.” 하고 외치고 싶다.

철둑으로 조선의 노래를 부르고 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딴 세상에 온 듯 감개무량하다.

경희(璟熙) 군이 왔다. 여러 해 동안 취직에 대해서 빈말을 하게 되어서 마음에 늘 안타깝게 여기던 터이므로 이번에는 기어이 붙여주고 싶다.


[해설 : 김경희는 필자의 8촌동생. 일기에 다시 언급은 없으나 며칠 후 일기에 봉양조합 직원으로 표시된 것으로 보아 바로 채용된 것 같다.]


머리가 아프고 사지가 쑤신다. 몸살인가보다. 〈초당〉 번역을 쉬고 요코타(橫田) 씨의 〈국제법〉을 읽었다. 오후엔 악영 군이 와서 내 앓는 걸 보고 곱쳐 자기 집에 가서 고추장을 가져오고 또 주사를 놓아주었다. 순수한 그 우정이 고맙다.

9월 2일 흐렸다 개였다.

몸살이 낫지 않아서 종일 누워 배겼다. 방문객이 많아서 잘 휴양할 수 없다.

오늘 제천조합서 군내 및 인근 조합 수뇌자 연락회의를 연다기 김용목(金容穆) 군을 보냈더니 밤에 와서 하는 말이 회의 결과로, “앞으로 금융조합이 어떻게 될는지 모르는 일이니 직원들끼리 적당히 위로금을 먹기로 할 것, 그리함에는 연합군이 진주하기 전에 속히 하는 것이 좋으니 내일이라도 곧 가불금으로 찾아 쓸 것, 액수는 매 인당 만 원 정도로 하고 그리 만들기 위해서 각인이 1기(期)씩 승급해서 월급 12월분 전불(前拂), 200할의 임시상여, 300할의 퇴직위로금, 그 외에 또 연합회 소정의 퇴직위로금을 먹고 그동안 적립한 신원보증금을 찾아 쓸 것.” 대개 이상과 같은 결정이 되었다고 한다.

나는 듣고나서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누구누구 모여서 그런 결의를 하였느냐 하니 제천조합의 조 이사견습, 윤 부사(副事), 황, 한 양 서기, 황강의 김 이사, 단양의 한 부이사 등이었는데 단양 한 씨만은 당장에 먹을 게 아니라 돈을 따로 준비해 두었다가 기회를 보아서 먹자고 했으나 모두가 내일 즉시로 먹자고 의논이 일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도 직원만 먹지 역원(役員)에게는 아무런 사례 방법도 강구하지 않았다고.

나는 그 사람들이 모두 환장한 사람이 아니냐 하고 그 부당함을 반복 타일렀으나 김 군이 종시 불복하기에 그럼 내 의견이 옳은가 그른가 김의 춘부장에게 품하여 보라고 하고 역정을 내니 돌아가긴 했으나 직원들의 천박한 생각엔 당연히 먹게 된 돈을 나 때문에 못 먹게 된다고 생각하고 조직적 원망이 빚을 걸 예상하니 몸도 괴롭고 좀처럼 잠들 수 없었다.

9월 3일 (월) 개였다 흐렸다.

[현재 직원 劉義洵 尹弼遠 金容穆 柳在洪 朴大圭 朴賛亨 河又榮 金璟熙 李良聖 南基淑 安相億 安聖姬]

어젯밤 문제로 아침에 윤 서기를 불러다 대강 내 의견에 대한 동의를 구하고 낮에 유, 윤, 김, 류, 네 사람을 불러서 이렇게 얘기했다.

“제천조합 사람들이 생각이 부족한 것 같다. 왜 하필 만 원씩만 먹기로 해, 사람의 자식들이 담뽀가 그렇게 적어, 먹으려면 조합에 있는 수십만 원을 다 나눠먹고 배 쓰다듬지. 이 판국에 잡아갈 경찰이 없겠다, 책임을 추궁할 감독관청의 조직이 무너졌겠다, 좀 좋아? 아예 예금도 내어줄 것 없고 한 사람이 한 십만 원으로 잡아가지고. 정 하늘이 무서우면 도망이라도 치지, 붙들어갈 사람 없겠다, 왜 도적질을 하려면 하필 만 원이리요. 구구하게 몇 할이니 하는 계산은 해 무얼 하나, 힘대로 짚이는 대로 제각각 돈뭉치를 움켜잡고 나설 것이지.

그렇지 않고 만일 이치로 따진다면 그 사람들의 결의가 천부당만부당하다. 관청에서는 50할, 식량영단에선 월급 3월분, 상여 70할이 확실하고 연합회선 200할 설이 있으나 잘 알 수 없고. 조합에서 700할 가까이 먹고 그나마 임시상여 외에 퇴직위로금 300할이 무엇이며 그 외에 또 연합회 소정의 퇴직위로금을 먹는다니 이(理)에 닿지 않는 말이다. 이걸 비밀로 하자고 한다지만 이러한 비밀이 지켜지는 법이 없고 또 앞길이 창창한 우리 젊은 사람들이 왜 비밀로 해야만 할 어두운 돈을 먹을 필요가 무어냐, 앞으로 좋은 세상에 우리 힘대로 벌어서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는데 이런 시절에 불의의 돈을 먹을 필요가 무엇이냐.  

예전 사람도 ‘不義而富且貴는 於我에 如浮雲(의롭지 않은 부귀는 내게 뜬구름과 같다)’이라 하지 않았느냐. 그처럼 부당한 금액을 나눠 먹었다면 조합원이나 사회 사람들이 도적놈이라 할 것이며 또 그렇게 욕할 사람이 없다더라도 우리 양심에 부끄러울 일 아니냐, 이때껏 공명정대하게 일해 나온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우리가 일시의 돈에 눈이 어두워서 도적놈 소리 들을 게 무에며 한평생 두고두고 양심에 부끄러울 짓을 왜 할까보냐. 그나마 내일 그 가치가 어떻게 전락할지도 모르는 일본정부 발행의 지전(紙錢)에 억탁해서. 그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리오.  

[해설 : 1945년 9월 28일자 〈매일신보〉 ”일본인 경제교란 목적으로 조선은행권 남발“ 기사에 조선은행권 발행고 추이가 8월 15일 49억 7514만여 원, 9월 8일(미군 진주일) 84억 6389만여 원, 9월 26일 86억 3118만여 원으로 보도되었다. 100원짜리 고액권으로 찍는데도 인쇄 능력이 달려 민간의 인쇄소까지 동원되었고, 인쇄 품질에 문제가 있어 상인들이 ”붉은 돈“을 받지 않는 현상까지 일어났으나 미군정이 그 유통을 강제시켰다. 9월 8일까지 24일 동안 통화량을 70%나 늘린 화폐 남발은 엄청난 규모의 ‘경제 테러’였다. 경제가 박살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총독부가 여기저기 뿌린 뭉칫돈이 ”검은 돈“으로 사회 질서 파괴에 쓰였다. 금융계에 종사해 온 필자는 ”일본정부 발행의 지전“이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을 감지한 것 같다.]


우리가 이때까지 한 조합을 맡아서 경영해 오다가 이러한 혼란시대를 당해서 감독관청이 기능을 상실했다고 그리고 마침 현금을 보유한 걸 기화로 부당한 금액을 나눠 가진다면 그는 명백한 배임죄다. 배임죄라는 건 일본 형법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미국 형법에도 있다. 미국 형법에 있는 것이 무서운 게 아니고 우리 양심의 형법에 있는 것이 무서운 것이다. 또 여러분이 혹시 잘못 생각하면 인근 조합에서 다 먹는 걸 우리만 못 먹으면 서운하다고 생각할는지 모르나 세상 사람들이 다 도적질하니 나도 해야겠다는 법이야 있나. 온 세상이 다 불의에 침륜(沈淪)해도 나는 똑바로 정의의 횃불을 들고 꼿꼿이 서 있다가 마침내는 세상의 어두운 구석을 모두 비치겠다는 기개가 있어야지.

들으면 충북선 어떤 역에서 황금엽 연초를 한 짐 해 지고 청주로 부정 매매하러 가는 걸 역장이 붙들고 지금 전매국이 없어졌다고 그러는 건 옳지 못하다, 우리가 앞으로 좋은 새나라를 세워서 훌륭한 통제가 내리기를 기다리는 것이 대국민의 태도답지 않냐고 타일러도 그 사람이 기어이 듣지 않고 차를 타니 차중의 승객들이 모두 나무라고 물건을 팽개치고 해서 그 사람을 징계하더라고 한다. 이건 아무리 어지러운 세상에라도 어느 구석에선 정의의 싹이 숨 죽지 않고 남아있다는 걸 말하는 사실이다. 남이 다 하는 부정 매매를 그 사람 하나만이 못하면 그 사람만의 손해가 아니냐고 생각할는지 모르나 온 세상이 다 부정 매매를 하더라도 나만은 아니한다는 청년다운 긍지가 있어야지. 그도 일본시대라면 또 몰라도 우리나라의 태동기인 이 중요한 때에 삼천만이 모두 자숙자계(自肅自戒)해서 조금이라도 민족국가에 기여할 것을 염원해야지 한 푼이라도 부정당한 돈을 먹으려고만 애를 써서야 쓰겠느냐.

이 점을 아무리해도 여러분이 이해 못한다면 나는 오늘로 조합을 사직할 터이니 마음대로 하라. 나는 내 목에 칼이 들어오는 한이 있더라도 내 손으로 불의에 결재를 할 수는 없다.”

이렇게 좋은 말로 타일렀더니 모두 잘 양해해서 그네들의 발언으로 내가 짐작한 것보다도 오히려 저율로 무사히 낙착되었다.

내 조합 생활 중 가장 큰 위기를 무사히 넘겼다. 밤에는 적이 마음이 놓였다.

몸이 시원치 않아서 종일 복약하고 누웠는데도 방문객이 끊이지 않아 아내가 아예 정치가는 되지 말고 산중으로 들어가자고 발언.

수산(水山)으로 전근 갔던 이승팔(李承八) 씨 내방.

저녁에는 이재과의 류무준(柳武俊) 씨가 왔기에 이 판국에 구구로 들어앉았지, 무슨 낯으로 돌아다닐까 생각하니 얄밉고 더욱이 무슨 조사를 해달라기에 조선총독부가 없어진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인데 이재과의 공문을 보면 아직도 몇십 년 지속되는 것 같으니 그 머리가 노-말하냐고 퉁을 주고 저녁을 먹여 보내다.

어제 원주 보냈던 대규 오고 이중연 씨도 함께 와서 신명(新明)여학교 개교하기에 이르렀으니 선생으로 와 달라기에 수신 한 시간 역사 두 시간 쯤은 맡아보아도 좋겠다고 응낙하였다.

9월 4일 흐렸다 개였다.

이중연 씨가 10일 고사(考查), 15일 개교식에 와 달라기 15일은 가겠다 하고 당일의 축사만은 고사하였다. 고사에 쓸 사상, 정서, 이지(理智) 세 가지에 대해서 상의에 응하고 교원으로 고옥남(高玉南) 씨, 정희준(鄭熙俊) 군을 추천. 오후 차로 떠났다.

유의순(劉義洵) 서기가 서울 가겠다기 그 부당함을 타일렀다.

오후엔 서악영 군이 놀러와서 주사 놓아주고 책 보다 갔다. 그 형 정렬(廷烈) 씨도 오고.

몸은 괴로운데 방문객의 폭주로 골치아프다. 이즈음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들떠서 집에 가만 있지 못하는 때문일까.

 

9월 5일 비오다.

영어영문학강좌 중의 영국현대풍속지(市河晴子)와 미국현대풍속지(石川欣一)를 다 읽다.

이치카와(市河) 씨의 글이 지극히 면밀하고 침착한 데 반하여 이시카와(石川) 씨의 글은 흥미롭기는 하나 작문이 부경(浮輕)하고 내용이 공소(空疏)한 것 같다. 좋은 콘트라스트를 이루었다. 이 대조는 작자의 성별에서 오는 것일까, 그 개성에 말미암음일까, 또는 영-미 양국의 국민성과 문학의 경향이 작자들의 기질에 작용한 때문일까. 매우 자미로운 현상이다.

성희(聖姬)와 삼규(三圭)에게 신명여학교에 가도록 권했다. 조선의 새 일꾼, 훌륭한 어머니가 더욱더욱 많아지이다.

[해설 : 박삼규는 필자의 생질녀. 박대규의 동생. 전쟁 때 월북한다. 안성희는 조합 직원.]


기람시조집을 오랜만에 꺼내 읽어보았다. 전에 없이 잘 되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그 전에 몇 수 읽어보았을 때 그 꺽꺽한 표현이 생소하여 친할 수 없이 생각된 것은 나의 피상적 관찰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억지로 글자를 긁어모은 것 같이 보이는 것, 서투른 기교, 미숙한 사상이 없지 않다. 예하면 끝 장의 밥풀꽃 같은 것은 나쁘게 말하면 아이들 장난 같다. 그와 반대로 썩 좋다 생각되는 것도 많다.

“병아리 어미 찾아 마당가에 맴맴 돌고
시렁 위 어린 누에 한잠을 자고 날 때
누나들 나를 다리고 뽕을 따러 나가오”

로 시작한 “그리운 그 날” 등, 참으로 잘 되었다.

그러나 지용(芝溶)의 발문은 재기횡일(才氣橫溢)하긴 하나 작문이 중후하지 못하고 문의에 수긍할 수 없는 것이 많다. 옛날 시조문학의 최고수일(最高秀逸)을 송강(松江)이라 하고 그 송강의 작(作)은 취여(醉餘)의 가성(呵成)이라 하니 우리의 시조 유산을 통틀어 그리 낮게 평가함이 타당할는지?

[해설 : 〈가람시조집〉의 정지용 발문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송강의 시조가) 千古에 빛날 만한 天才的인 것이기는 하나 或은 漢學의 副業으로 醉餘에 一氣呵成으로 된 것이 多分인 것으로 살필 수 있고...”] 

그리고 현대시조에 있어서도 가람을 너무 높이 추켜올리느라고 다른 시조인을 지나치게 타박준 것이 마뜩찮게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