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요청, 사실상 전부 무시
유네스코가 일본에 '대화하라'고 권고한 관련국은 한국이다. 그러나 이날 공개된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은 한국이 요청했던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자 증언 전시 ▲강제노역을 포함한 전체 역사 설명 ▲한·일 강제병합이 합법이라고 시사하는 전시물 철거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진정한 추모 등 요구 사항을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보고서에서 일본은 "한국인 노동자의 증언을 참고자료로 비치했다"고 해명하거나 "지난 2년 동안 한국인을 비롯한 광산 노동자들의 봉급과 복지에 대한 비교 연구를 지원했다"며 마치 유네스코의 결정을 충실히 이행한 것처럼 포장했다. "(지난해 9월 결정문 채택 이후) 한국 정부와 대화를 지속했다"고 강조하면서다.
외교부 "약속 불이행 유감"
향후 조선인 강제노역의 역사가 있는 세계유산의 경우 추가 등재가 녹록지 않을 거란 경고도 나왔다. 외교부 당국자는 "일본이 앞으로도 계속 합의사항을 성실히 이행하지 않는다면 한국인 강제동원의 역사가 있는 유산의 추가 등재는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일본은 군함도 등과 관련해 유네스코에 2017년, 2019년, 2022년 세 차례에 걸쳐 '이행경과보고서'를 제출했고, 2020년에는 강제노역 현장이 아닌 도쿄에 개관한 산업유산 정보센터 관련 '해석전략 이행 보고서'도 제출했다. 이날 한 외교부 당국자는 기자들과 만나 "10년 동안 이런 (일본의) 보고서들이 나오는 것은 한국이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라고 자평했다.
그러나 일본이 거듭 보고서를 제출하면서도 등재 당시 인정했던 조선인 노역의 강제성을 두 번 다시는 언급하지 않는 데다 '전체 역사'를 알리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걸 외교부가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일본은 2015년 7월 근대산업시설을 등재하면서 "조선인들이 '자기 의사에 반해(against their will)' 동원돼 '강제로 노역(forced to work)'했다"고 공개 발언했다. 지난 7월 사도광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할 때도 일본은 2015년의 강제노역 인정 발언을 포함한 '모든 결정과 약속'을 "명심(bearing in mind)하겠다"고 밝혔다.
약속 믿었다 2연타 뒤통수
같은 양상은 올해 사도광산 등재 이후에도 반복됐다. 강제노역 피해자를 기리겠다며 만든 전시 시설에는 강제성을 인정하는 표현이 실종됐고, 추도사가 빠진 '사도광산 추도식'이 실시됐다. 일본의 약속을 믿고 사도광산까지 갔던 유족들이 한국만 참여하는 반쪽짜리 별도 추도식에 참석한 뒤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이에 정부가 일본의 세계유산 등재 취소를 유네스코에 촉구하는 등 '강수'를 둬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지만, 현실적으로 쉽진 않을 전망이다. 실제 문재인 정부는 2020년 6월 일본의 근대산업시설 역사 왜곡에 대응해 "등재 취소 가능성 검토를 포함한 결정문이 채택되도록 협조해달라"는 서한을 당시 유네스코 사무총장에게 보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이날 외교부에 따르면 세계유산위 규정상 등재 취소는 '유산의 중대한 변경'이 있다고 판단될 때 제한적으로 가능하다. 전례를 볼 때 문화유산이 훼손되거나 제대로 보전되지 않는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등재가 취소됐던 이유다.
이와 관련, 외교부 당국자는 "등재 취소가 가능한 '중대한 변경'이 무엇이냐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어 정부에서 관련 검토를 하고 있다"며 "세계유산위의 결정을 일본이 이행하지 않으면서 유네스코 안에서 일본의 평판, 입지에도 충분한 불이익이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