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 소리 없는 산∙산∙산 있다…강릉∙속초 꺾은 뜻밖의 여행지

겨울철 당일치기 쏠쏠, 강원 원주

구룡사에서 바라본 치악산의 그리메. 김홍준 기자

구룡사에서 바라본 치악산의 그리메. 김홍준 기자

19세. 즐겁다. 미끄러지면 서로 잡아주고, 뒤처지면 서로 끌어준다. 그리고 웃는다. 이 ‘원주 고딩’ 넷은 올해 소망을 최소 둘은 이뤘단다. 전석훈군이 말했다. “1순위가 넷 모두 바로 대학에 붙는 거였어요. 효도했죠(웃음). 두 번째가 치악산 등산이었어요. 동네 산인데, 이제야 오네요.”

치악산(1288m). 이 산에 가면 ‘치가 떨리고 악이 받친다’는데, 이 원주 원주민들은 ‘동네 산’이란다. 한겨울 7부 바지 입고 8부 능선으로 운동 삼아 온 듯한 40대 남성에게도 푸근한 산이다.

강원도 원주 치악산(1288m) 정상 비로봉에는 세 개의 돌탑 용왕탑, 산신탑, 칠성탑이 있다. 1960년대 원주에서 제과점을 운영하던 용창준씨가 쌓았다. 경북 구미에서 온 박지훈씨 일행이 산신탑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김홍준 기자

강원도 원주 치악산(1288m) 정상 비로봉에는 세 개의 돌탑 용왕탑, 산신탑, 칠성탑이 있다. 1960년대 원주에서 제과점을 운영하던 용창준씨가 쌓았다. 경북 구미에서 온 박지훈씨 일행이 산신탑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김홍준 기자

 
원주에 치악산만 산이 아니다. 고양시에서 GTX-A를 타고 12분, 그리고 서울역에서 KTX로 갈아탄 뒤 다시 1시간 10분. 환승 시간까지 넉넉히 잡아 1시간 30분. 몸은 원주에 와있게 된다. 먼저 가 있던 마음이 마중 나온다. 승용차로도 비슷한 시간이 걸린다. 원주에는 몇 개의 ‘산’이 기다리고 있다. 치악산·소금산 그리고 뮤지엄SAN. ‘산’이 이름 뒤에 단단하게 붙었지만, 모두 치가 떨리고 악이 받치는 그 산이 아니다. 남녀노소 모두 요리사가 불을 올리듯, ‘강/약/중강/약’으로 조절 가능한 곳들이다.

작년 원주 방문 3377만, 강릉·속초보다 많아
강원도는 제주도와 여행지 선호 1순위를 놓고 엎치락뒤치락하는 곳. 그런데 강원도 안에서 원주 방문객이 가장 많다. 강릉이나 속초를 1위로 꼽을 수 있을 텐데, 지난해 원주에 무려 3377만 명이 찾았다(한국관광데이터랩). 속초(2478만 명)를 500~600만 명 차이로 진작부터 앞질러 오다가 차이를 벌렸다. 3000만 명 초반 페이스를 유지하던 강릉(3323만 명)을 쫓아 스퍼트를 올려 어깨를 견준다. 우선 길이 좋다.

하도 안 신어 ‘가수분해’로 떨어져 나간 등산화 밑창을 들고 있는 치악산의 19세 등산인들. 김홍준 기자

하도 안 신어 ‘가수분해’로 떨어져 나간 등산화 밑창을 들고 있는 치악산의 19세 등산인들. 김홍준 기자

애초에 길이 있었다. 조선 9개 대로 중 제 3로인 관동대로는 한양에서 강원도 강릉과 삼척을 거쳐 경북 울진 평해까지 880리(346㎞)에 이른다. 길이 강원도에 들어서자마자 만나는 큰 고을이 원주다. 1259년 송필, 1728년 정무중 등 모반을 꾀한 자가 있었고, 1683년 남편을 죽인  강상죄인(綱常罪人)이 생겨 한때 목(牧)에서 현(縣)으로 지위가 떨어지기도 했지만, 원주는 강원도의 중심이었다. 원주의 ‘원’이 강릉의 ‘강’과 합쳐 ‘강원’ 이름을 만들었으니, 원주의 위세는 대단했다. 지금의 경강선과 중앙선 일부는 관동대로를 따라간다. 고속도로도 광주원주와 영동·중앙 등 3개가 지나간다.


태종 이방원은 치악산 각림사에서 운곡 원천석(1330~?)에게 글을 배웠는데, 조선 건국 직후 이 관동대로를 따라 원주에 왔다. 요샛말로 하면 모교 방문이다. 그런데 조선 개국을 반대한 원천석은 치악산 깊은 곳에 들어가 이방원과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다. 이 내용은 200여 년이 지난 현종실록(1663년 4월 27일)에야 등장하는데,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여하튼 이방원은 하염없이 치악산 동쪽 강림에서 스승을 기다리다 돌아갔다.

치악산 남대봉에 피어난 상고대. 김홍준 기자

치악산 남대봉에 피어난 상고대. 김홍준 기자

600여 년이 흐른 지난달 14일. 의정부에서 온 소방관 주형진(27)씨는 이방원이 머물렀던 강림을 지나 치악산 정상 비로봉에 올랐다. 이 ‘부곡 코스’는 정상 비로봉에 이르는 가장 순한 길. 그는 다음날 다시 상원사를 거쳐 치악산 종주에 나섰다. 

체감 영하 20도. 해발 1100m 상원사에 상고대가 가득 피었다. 상고대는 대기 중의 습기가 나무나 바위에 순간적으로 얼어붙어 생긴 결정. 추워서 더 푸른 하늘(복사냉각 현상)과 차가워서 새하얗게 질린 상고대(무빙 현상)는 청백전을 벌이는 듯했다. 하도 강렬하고 격렬해서, 차마 제 눈 뜨고 못 볼 정도라 선글라스를 껴야 했다. 겨울 치악산. ‘강한 길’로 온 값어치였다. 주씨는 “종주길 막바지 구룡사까지 11시간을 가야 한다”며 쉴 틈이 없었다.

강원도 원주 치악산(1288m) 상원사는 높이 1100m에 있는 높은 절이다. 오른쪽 범종각 앞 소나무에 만들어진 상고대가 장관이다. 김홍준 기자

강원도 원주 치악산(1288m) 상원사는 높이 1100m에 있는 높은 절이다. 오른쪽 범종각 앞 소나무에 만들어진 상고대가 장관이다. 김홍준 기자

 

강원 원주

강원 원주

천년고찰 구룡사를 먼저 찾는다면 ‘악’ 소리 날 일이 없다. 김모(38·서울)씨는 “구룡사에서부터 계단 하나 없는 순한 길이 이어져서 엉겁결에 세렴폭포까지 올라왔다”고 했다. 구룡사 건너편 빼곡한 전나무 숲길을 거닐어도 치악산이 건네주는 넉넉한 품을 마주 안아줄 수 있다. 치악산 둘레길 중 구룡길과 이방원이 수레를 타고 넘어왔다는 수레너미길도 얌전하다. 주씨처럼 ‘강’으로, 김씨처럼 ‘약’으로. 이렇게 치악산을 찾는 사람들은 한 해 100만 명을 넘는다(2024 국립공원 기본통계).

치악산이 100대 명산이라면, 간현관광지와 뮤지엄SAN은 한국관광 100선에 들어간다. 문화체육관광부가 2년마다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곳’이라며 소개하는 관광지다. 간현관광지는 6회 연속, 뮤지엄SAN은 5회 연속 뽑혔다.

소금산그랜드밸리 울렁다리에서 바라본 출렁다리. 김홍준 기자

소금산그랜드밸리 울렁다리에서 바라본 출렁다리. 김홍준 기자

강원도 원주 서쪽 섬강과 삼산천이 만나는 곳에 자리잡은 간현관광지 내 소금산그랜드밸리는 지난 2021년 11월 개장했다. 기존 출렁다리(높이 100m, 길이 200m)에 울렁다리(404m)와 스카이타워, 소금잔도, 에스컬레이터 등을 더했다. 2시간이면 남녀노소 누구나 편히 다녀올 수 있다. 사진에 울렁다리와 스카이타워, 소금잔도 일부가 보인다.김홍준 기자

강원도 원주 서쪽 섬강과 삼산천이 만나는 곳에 자리잡은 간현관광지 내 소금산그랜드밸리는 지난 2021년 11월 개장했다. 기존 출렁다리(높이 100m, 길이 200m)에 울렁다리(404m)와 스카이타워, 소금잔도, 에스컬레이터 등을 더했다. 2시간이면 남녀노소 누구나 편히 다녀올 수 있다. 사진에 울렁다리와 스카이타워, 소금잔도 일부가 보인다.김홍준 기자

파주에서 온 김모(64)씨는 “소싯적 날다람쥐라 내가 산이라면 좀 아는데, 이 정도면 매우 볼 만하고 편한 산”이라며 소금산(간현관광지)을 추켜세웠다. 간현관광지는 소금산그랜드밸리로도 부른다. 3년 전인 2022년 1월, 기존 출렁다리(높이 100m, 길이 200m)에 울렁다리(높이 200m, 길이 404m)와 잔도·스카이타워를 더했다. 2022년이면 원주가 스퍼트를 내면서 연 방문객 3000만 명대로 올라선 해다. 입구에서 출렁다리까지 540계단이 있지만 단 높이가 낮아 힘들지는 않다. 이후 탐방 데크는 평지처럼 이어진다. 에스컬레이터로 하산할 수도 있으니 5세 손자는 재롱을 이어가고, 75세 할머니는 너털웃음 쏟아낼 여유도 있다.

여유가 파다하면 밋밋한 법. 출렁다리에서 한 번, 울렁다리에서 한 번 가슴이 벌렁한다. 200m 밑 푸른 물도 일렁인다. 지난해 60만 명 안팎으로 찾았단다. 한 지역을 대표하는 곳은 술 이름도 가져간다. 치악산 막걸리가 있고, 출렁다리 막걸리도 있다. 막걸리 마신 김에 에라. 서원주역까지 걸어가도 된다. 20분.

소금산·뮤지엄SAN, 한국관광 100선 뽑혀

강원도 원주 '뮤지엄 SAN'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한 곳이다. 알렉산더 리버만의 '아치형 입구(Archway)'는 산업용 오브제를 날카롭게 커팅해 관람객을 부드럽게 맞이해 준다. 김홍준 기자

강원도 원주 '뮤지엄 SAN'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한 곳이다. 알렉산더 리버만의 '아치형 입구(Archway)'는 산업용 오브제를 날카롭게 커팅해 관람객을 부드럽게 맞이해 준다. 김홍준 기자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뮤지엄SAN. 김홍준 기자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뮤지엄SAN. 김홍준 기자

원주 서쪽의 또 다른 산, 뮤지엄SAN은 오크밸리 중턱에 공간(Space)과 예술(Art)·자연(Nature)의 앞머리를 가져온 전원형 미술관이다. 노출 콘크리트 건축의 대가 안도 다다오의 설계로 2013년 개관했다.

조지 원스턴의 ‘The holly and the ivy’가 흘러나왔다. 이 앨범 ‘December’ 재킷 속 자작나무가 튀어나와 박물관 앞을 일궜나. ‘아치웨이’는 12개의 툭툭 끊어진 파이프가 육중하게 이어져 관람객을 빨갛게 맞이한다. 그 뒤 본관은 수상부양을 한 느낌. 본관 창조갤러리에서는 6월 1일까지 ‘모든 것은 변한다’는 주제로 뮤지엄SAN의 소장품 전시를 하고 있다. 백남준의 ‘TV 로댕(생각하는 사람)’, 중국 작가 장환이 타다 남은 재와 강철로 빚은 ‘갑작스러운 깨달음 No. 1’ 등을 만날 수 있다. 안도가 2023년 구상한 ‘빛의 공간’은 십자의 틈으로 들어오는 자연의 빛이 다른 세계를 창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입구에서부터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제임스터렐관까지의 거리는 약 2.5㎞. 명상관, 종이 박물관, 백남준 홀 등도 있어 제대로 누리려면 반나절은 걸린다.

강원도 원주 '뮤지엄 SAN'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한 곳이다. 뮤지엄 SAN 미술관을 설계한 안도 타다오는 2023년 또 다른 명상 공간 '빛의 공간'을 조성했다. 김홍준 기자

강원도 원주 '뮤지엄 SAN'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한 곳이다. 뮤지엄 SAN 미술관을 설계한 안도 타다오는 2023년 또 다른 명상 공간 '빛의 공간'을 조성했다. 김홍준 기자

 
한 해 20만 명이 찾는 명소가 됐지만, 안도가 “산골에 누가 미술을 보러 오겠냐”며 망설였단다. 고(故)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이 “아시아에, 아니 세계에 없는 미술관을 만들 것”이라며 설득했다고 한다.

하루에 서원주의 소금산그랜드밸리와 뮤지엄SAN에서 감흥을 채우는 것도 좋겠다. 하지만 구룡사 관음전에서, 이른 시간 햇빛이 만드는 산그리메만 바라봐도 족할 수 있다. 회색빛으로 변한 반계리 은행나무를 홀로 찾는 맛도 진수성찬 못지않을 것이다. 조지 윈스턴의 음악은 4분의 4박자 ‘Thanksgiving’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강/약/중강/약’ 각자의 박자에 맞춰 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