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철 당일치기 쏠쏠, 강원 원주
치악산(1288m). 이 산에 가면 ‘치가 떨리고 악이 받친다’는데, 이 원주 원주민들은 ‘동네 산’이란다. 한겨울 7부 바지 입고 8부 능선으로 운동 삼아 온 듯한 40대 남성에게도 푸근한 산이다.
원주에 치악산만 산이 아니다. 고양시에서 GTX-A를 타고 12분, 그리고 서울역에서 KTX로 갈아탄 뒤 다시 1시간 10분. 환승 시간까지 넉넉히 잡아 1시간 30분. 몸은 원주에 와있게 된다. 먼저 가 있던 마음이 마중 나온다. 승용차로도 비슷한 시간이 걸린다. 원주에는 몇 개의 ‘산’이 기다리고 있다. 치악산·소금산 그리고 뮤지엄SAN. ‘산’이 이름 뒤에 단단하게 붙었지만, 모두 치가 떨리고 악이 받치는 그 산이 아니다. 남녀노소 모두 요리사가 불을 올리듯, ‘강/약/중강/약’으로 조절 가능한 곳들이다.
작년 원주 방문 3377만, 강릉·속초보다 많아
강원도는 제주도와 여행지 선호 1순위를 놓고 엎치락뒤치락하는 곳. 그런데 강원도 안에서 원주 방문객이 가장 많다. 강릉이나 속초를 1위로 꼽을 수 있을 텐데, 지난해 원주에 무려 3377만 명이 찾았다(한국관광데이터랩). 속초(2478만 명)를 500~600만 명 차이로 진작부터 앞질러 오다가 차이를 벌렸다. 3000만 명 초반 페이스를 유지하던 강릉(3323만 명)을 쫓아 스퍼트를 올려 어깨를 견준다. 우선 길이 좋다.
태종 이방원은 치악산 각림사에서 운곡 원천석(1330~?)에게 글을 배웠는데, 조선 건국 직후 이 관동대로를 따라 원주에 왔다. 요샛말로 하면 모교 방문이다. 그런데 조선 개국을 반대한 원천석은 치악산 깊은 곳에 들어가 이방원과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다. 이 내용은 200여 년이 지난 현종실록(1663년 4월 27일)에야 등장하는데,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여하튼 이방원은 하염없이 치악산 동쪽 강림에서 스승을 기다리다 돌아갔다.
체감 영하 20도. 해발 1100m 상원사에 상고대가 가득 피었다. 상고대는 대기 중의 습기가 나무나 바위에 순간적으로 얼어붙어 생긴 결정. 추워서 더 푸른 하늘(복사냉각 현상)과 차가워서 새하얗게 질린 상고대(무빙 현상)는 청백전을 벌이는 듯했다. 하도 강렬하고 격렬해서, 차마 제 눈 뜨고 못 볼 정도라 선글라스를 껴야 했다. 겨울 치악산. ‘강한 길’로 온 값어치였다. 주씨는 “종주길 막바지 구룡사까지 11시간을 가야 한다”며 쉴 틈이 없었다.
치악산이 100대 명산이라면, 간현관광지와 뮤지엄SAN은 한국관광 100선에 들어간다. 문화체육관광부가 2년마다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곳’이라며 소개하는 관광지다. 간현관광지는 6회 연속, 뮤지엄SAN은 5회 연속 뽑혔다.
여유가 파다하면 밋밋한 법. 출렁다리에서 한 번, 울렁다리에서 한 번 가슴이 벌렁한다. 200m 밑 푸른 물도 일렁인다. 지난해 60만 명 안팎으로 찾았단다. 한 지역을 대표하는 곳은 술 이름도 가져간다. 치악산 막걸리가 있고, 출렁다리 막걸리도 있다. 막걸리 마신 김에 에라. 서원주역까지 걸어가도 된다. 20분.
소금산·뮤지엄SAN, 한국관광 100선 뽑혀
조지 원스턴의 ‘The holly and the ivy’가 흘러나왔다. 이 앨범 ‘December’ 재킷 속 자작나무가 튀어나와 박물관 앞을 일궜나. ‘아치웨이’는 12개의 툭툭 끊어진 파이프가 육중하게 이어져 관람객을 빨갛게 맞이한다. 그 뒤 본관은 수상부양을 한 느낌. 본관 창조갤러리에서는 6월 1일까지 ‘모든 것은 변한다’는 주제로 뮤지엄SAN의 소장품 전시를 하고 있다. 백남준의 ‘TV 로댕(생각하는 사람)’, 중국 작가 장환이 타다 남은 재와 강철로 빚은 ‘갑작스러운 깨달음 No. 1’ 등을 만날 수 있다. 안도가 2023년 구상한 ‘빛의 공간’은 십자의 틈으로 들어오는 자연의 빛이 다른 세계를 창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입구에서부터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제임스터렐관까지의 거리는 약 2.5㎞. 명상관, 종이 박물관, 백남준 홀 등도 있어 제대로 누리려면 반나절은 걸린다.
한 해 20만 명이 찾는 명소가 됐지만, 안도가 “산골에 누가 미술을 보러 오겠냐”며 망설였단다. 고(故)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이 “아시아에, 아니 세계에 없는 미술관을 만들 것”이라며 설득했다고 한다.
하루에 서원주의 소금산그랜드밸리와 뮤지엄SAN에서 감흥을 채우는 것도 좋겠다. 하지만 구룡사 관음전에서, 이른 시간 햇빛이 만드는 산그리메만 바라봐도 족할 수 있다. 회색빛으로 변한 반계리 은행나무를 홀로 찾는 맛도 진수성찬 못지않을 것이다. 조지 윈스턴의 음악은 4분의 4박자 ‘Thanksgiving’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강/약/중강/약’ 각자의 박자에 맞춰 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