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무인기 의혹' 국제기구 가져간 北…외교부 "정치화 말라" 반박

북한이 한국 무인기가 평양 상공에 침투했다며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에 조사를 요청한 것과 관련해 외교부가 "근거 없이 ICAO를 정치화하는 데 반대한다"고 맞받았다. 계엄 국면에서 한국군이 실제로 무인기를 보냈을 거란 의혹이 짙어지자 북한이 이런 분위기를 활용해 국제적인 여론전에 나섰다는 지적이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지난해 10월 국방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평양에 침투한 무인기의 잔해를 분석한 결과 한국 국군의 날 기념행사 때 차량에 탑재됐던 무인기와 동일한 기종이라고 밝혔다. 노동신문=뉴스1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지난해 10월 국방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평양에 침투한 무인기의 잔해를 분석한 결과 한국 국군의 날 기념행사 때 차량에 탑재됐던 무인기와 동일한 기종이라고 밝혔다. 노동신문=뉴스1

11일 정부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은 최근 ICAO에 무인기 침투와 관련해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하는 진상조사를 요청했다. ICAO는 각종 항공 분쟁에 관여해 회원국 간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유엔 전문 기구로 한국과 북한 모두 ICAO의 회원국이다. ICAO는 항공기의 안전한 운항과 관련한 규정을 담은 '시카고협약'(국제민간항공협약)에 따라 설립됐다.

북한이 평양 무인기 침투 주장을 ICAO까지 끌고 간 배경에는 시카고 협약 8조를 근거로 삼았을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해당 조항에는 '조종자 없이 비행할 수 있는 항공기는 체약국의 특별한 허가 없이 또 그 허가 조건을 따르지 않고는 체약국의 영역을 비행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있다.

이와 관련, 외교부 당국자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정부는 북한이 명확한 근거 제시 없이 ICAO를 정치화하는 데 반대한다"며 "나아가 북한은 국제 규범을 위반한 채 우리와 국제사회 민간 항공 안전에 심대한 위협을 자행하는 위성항법장치(GPS) 교란부터 중단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외교부 당국자는 "ICAO 규정 및 관례상 이사회는 체약국(조약을 맺은 나라)이 제기한 어떠한 문제에 대해서도 논의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즉, ICAO 회원국인 북한이 무인기 관련 진상조사를 요청하면 ICAO는 어떻게든 관련 논의에 나설 수밖에 없는 구조란 설명이다. 정부는 구체적인 대응 방안 마련에도 나섰다고 한다. 북한이 무인기 문제를 이사회에 상정해 관련 회의가 열릴 경우 한국의 공식 입장과 이에 대한 근거를 표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ICAO는 회원국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 이사회 차원의 회의를 열어 논의하거나 우려 및 규탄 표명, 재발 방지 촉구 등을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진상조사팀을 꾸려 실제 현장 조사에 착수할 수도 있다. 앞서 2021년 5월 ICAO는 유럽연합(EU)이 벨라루스 당국을 상대로 반체제 언론인이 타고 있던 항공기를 강제 착륙시켰다는 의혹을 제기하자 진상 조사에 착수해 "벨라루스 고위층의 지시로 거짓 정보로 운항 중인 여객기를 착륙시켜 항공안전을 저해했다"는 조사 결과를 이듬해 발표했다.

북한 노동신문은 지난해 10월 "대한민국발 무인기에 의한 엄중한 주권 침해 도발 사건의 최종조사 결과를 발표"한다며 남한에서 보낸 무인기가 백령도에서 출발해 평양에 도착했다는 '비행 기록'을 공개했다. 노동신문=뉴스1

북한 노동신문은 지난해 10월 "대한민국발 무인기에 의한 엄중한 주권 침해 도발 사건의 최종조사 결과를 발표"한다며 남한에서 보낸 무인기가 백령도에서 출발해 평양에 도착했다는 '비행 기록'을 공개했다. 노동신문=뉴스1

그러나 북한의 평양 무인기 주장과 관련해 ICAO가 실제로 진상조사팀을 구성해 조사까지 진행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게 정부 안팎의 시각이다. ICAO 이사회에서 남북이 각각 입장을 표명하고 회원국들의 의견을 청취하는 데에 그칠 수 있다는 관측이다. 앞서 북한 국방성 대변인은 지난해 10월 담화를 내고 "평양에 침투한 무인기의 잔해를 분석한 결과 한국 국군의 날 기념행사 때 차량에 탑재됐던 무인기와 동일한 기종"이라며 사진도 공개했다. 그러나 군은 평양에 무인기를 보낸 적 있느냐는 질문에 꾸준히 "확인해줄 수 없다"는 NCND(긍정도 부정도 아님)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신희석 전환기정의워킹그룹(TJWG) 법률분석관은 "북한이 그간 ICAO의 결의 채택 등에 반발해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번에 '평양 무인기' 문제를 ICAO에 가져간 건 자기 모순적인 측면이 있다"며 "이사회에서 논의가 이뤄지더라도 막상 북한이 레이더 항적 등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 유야무야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도 북한이 항공기와 피랍자 10명의 송환을 거부하고 있는 대한항공 YS-11기 납북 사건 등 ICAO를 통해 북한에 문제를 제기할만한 다른 이슈가 상당히 있기 때문에 팩트에 기반해 반격을 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앞서 ICAO는 지난해 6월 한국 정부가 북한을 상대로 제기한 위성항법장치(GPS) 신호 교란 행위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하고 재발 방지를 촉구하는 결의를 채택하기도 했다. 특히 ICAO가 GPS 신호 교란 행위의 주체로 북한을 명시적으로 지목한 것은 당시가 처음이었다. 또한 ICAO는 2017년, 2022년, 2023년에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북한이 역으로 한국의 행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ICAO에 진상 조사를 요구한 건 전례를 찾기 힘든 일이라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