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만한 하얀꽃이 하늘거리네…안산 작은 섬 '야생화 낙원'

진우석의 Wild Korea <23> 안산 풍도

노란 복수초와 새순들로 활기가 도는 풍도 야생화정원. 지난해 3월 20일께 촬영했다.

노란 복수초와 새순들로 활기가 도는 풍도 야생화정원. 지난해 3월 20일께 촬영했다.

어느덧 풍도를 다섯 번째 찾는다. 이번 여정에는 야생화 전문가가 함께했다. 풍도를 30년째 드나들었다는 생태학자 최한수(58) 박사를 길잡이 삼아 따라갔다. 예전에는 화려한 꽃만 보였다면, 이번에는 마을과 사람들까지 눈에 들어왔다. 낡고 빛바랜 마을은 애잔하고, 꽃들은 여전히 경이로웠다.

야생화 박사를 따라서

서해누리호에서 바라본 풍도. 인천에서 2 시간, 대부도에서 1시간 30분쯤 걸린다.

서해누리호에서 바라본 풍도. 인천에서 2 시간, 대부도에서 1시간 30분쯤 걸린다.

“올 때 과자 좀 가져오세요. 할머니들 드리게. 거긴 가게가 없어요. 고기는 내가 사 갈게요.”

준비물이 과자라니, 고수는 역시 남다르다. 캠퍼 사이에서 소문난 해변 야영 장소 ‘붉배’에서의 하룻밤을 포기하고, 꽃과 주민을 함께 만나기 위해 민박집에 묵기로 했다.

대부도 방아머리선착장에서 풍도행 서해누리호에 올랐다. 객실에 들어서니 매점 아주머니가 최 박사를 반긴다. 최 박사는 아주머니의 이력을 살짝 귀띔해 준다. 풍도행 배에서 매점을 운영해 온 게 30여 년, 아주머니의 어머니는 백령도 가는 배에서 40년쯤 매점을 했다고 한다. 피는 못 속이는지, 아주머니 딸은 항공사 스튜어디스란다. 역마살이 대대로 내려오는 게 신기하다.

배가 인천 영흥도와 선재도 사이에 놓인 영흥대교 아래를 지났다. 풍도는 안산의 대부도, 인천의 승봉도, 충남 서산 삼길포항의 중간쯤에 자리한다. 행정구역은 안산시 단원구에 속한다. 풍도는 면적 1.84㎢, 해안선 길이가 약 5㎞인 작은 섬이다. 이름은 고로쇠나무가 많아 풍도(楓島)라고 불렸다.


꽃이 활짝 핀 풍도대극. 풍도바람꽃과 함께 섬을 대표하는 야생화다.

꽃이 활짝 핀 풍도대극. 풍도바람꽃과 함께 섬을 대표하는 야생화다.

풍도는 수산자원이 넉넉하지 않다. 섬 주변에 갯벌이 없는 까닭이다. 주민들은 해마다 겨울 몇 달 동안 인근 섬으로 이주해 수산물을 채취하며 살았다고 한다. 풍도의 풍요로움은 뜻밖의 장소에서 발견됐다. 후망산(175m) 일대를 화려하게 수놓는 야생화가 그것이다. 풍도는 야생화 자생지가 넓고 개체 수가 워낙 많다. 게다가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풍도바람꽃과 풍도대극을 만날 수 있어 더욱 특별하다. 풍도 선착장에 내리니 아직 한겨울 풍경이다. 과연 야생화가 피었을까? 커다란 배낭을 멘 백패커는 붉배 쪽으로, 우리는 민박집 ‘풍도랜드’로 향했다.

눈처럼 희고 여린 풍도바람꽃

야생화 정원으로 가는 입구에 서 있는 은행나무. 조선 16대 왕인 인조가 심었다는 전설이 있다.

야생화 정원으로 가는 입구에 서 있는 은행나무. 조선 16대 왕인 인조가 심었다는 전설이 있다.

점심으로 꽃게탕 백반을 먹은 뒤 길을 나섰다. 거대한 은행나무 앞에 서자 손바닥만 한 마을과 선착장이 보였다. 이 나무를 ‘인조의 은행나무’라고 부른다. 수령이 약 500년인 이 나무는 이괄의 난을 피해 충남 공주로 가던 인조(1595~1649)가 섬에 들러 심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어수거목(御手巨木)’이라고 부르며 풍도의 수호신으로 삼았다.  

풍도 복수초는 다른 지역보다 꽃이 크고 색이 진하다. 복슬복슬 자라난 진초록 잎과 가지가 귀엽다.

풍도 복수초는 다른 지역보다 꽃이 크고 색이 진하다. 복슬복슬 자라난 진초록 잎과 가지가 귀엽다.

은행나무 뒤편이 야생화 정원이다. 처음에는 꽃이 안 띄지만 어느 순간 하나둘 눈에 들어온다. 해묵은 낙엽들 사이에 노란 복수초가 보였다. 풍도의 복수초는 다른 지역 것보다 꽃이 크고 색이 진하다. 한번 꽃이 보이면, 계속 눈에 띄는 법. 이번에는 풍도바람꽃을 열심히 뒤졌다. 앞선 일행이 탄성을 질렀다. 가까이 가보니 손톱만 한 하얀꽃이 바람에 하늘거렸다. 풍도바람꽃을 영접했다. 

과거 풍도바람꽃은 변산바람꽃과 같은 꽃으로 알았지만, 식물학자 오병윤 교수가 밀선(蜜腺·꿀샘)이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밀선이 두 개로 갈라진 변산바람꽃과 달리 풍도바람꽃의 밀선은 넓은 깔때기 모양이다. 2009년 신종으로 학계에 알려졌고, 2011년 국가표준식물목록위원회에서 풍도바람꽃으로 명명했다.

낙엽을 뚫고 올라온 풍도바람꽃. 생김새가 닮은 변산바람꽃에는 없는 깔때기 모양의 밀선이 눈에 띈다.

낙엽을 뚫고 올라온 풍도바람꽃. 생김새가 닮은 변산바람꽃에는 없는 깔때기 모양의 밀선이 눈에 띈다.

풍도 동쪽 해안에 호젓한 몽돌해변이 숨어 있다. 둘레길을 따르다가 만날 수 있다.

풍도 동쪽 해안에 호젓한 몽돌해변이 숨어 있다. 둘레길을 따르다가 만날 수 있다.

야생화 정원에서 고개를 넘으면 붉배가 나오지만, 둘레길을 빙 둘러 가기로 했다. 풍도랜드 위쪽에 둘레길 입구가 있다. 둘레길로 접어들어 최 박사를 따라 해안으로 내려서니 뜻밖에도 몽돌해변이 나타났다. 풍도에 이런 해변이 있는 줄 몰랐다. 잠시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며 몽돌의 노래에 귀 기울였다. 

민박집에서 즐긴 삼겹살 파티

땅속에서 머리를 내민 풍도대극 꽃대.

땅속에서 머리를 내민 풍도대극 꽃대.

다시 길을 나섰다. 둘레길은 풍도 동쪽과 남쪽 해안을 휘돈다. 앞서던 최 박사가 “여기는 사람이 잘 안 오는 곳인데, 풍도대극과 복수초가 의외로 많다”고 말했다. 낙엽 사이로 붉은 꽃대가 총총 머리를 내민 게 보였다. 붉은대극과 같은 속인 풍도대극이다. 꽃봉오리가 열리면서 붉은색은 사라지고 연둣빛으로 바뀐다.  

붉배에서 만난 노을. 해가 질 때는 바위도 바다도 붉게 물든다.

붉배에서 만난 노을. 해가 질 때는 바위도 바다도 붉게 물든다.

붉배에 도착하니 저물녘이다. 붉은 바위가 첩첩 쌓인 이곳은 풍도 최고의 절경을 뽐낸다. 붉은 바위와 검푸른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에 해가 뉘엿뉘엿 떨어졌다. 누가 서 있어도 그림이 완성된다.

풍도랜드에 돌아와 삼겹살 파티를 열었다. 노릇노릇 고기를 구워 마을 아주머니들이 캔 전호(한약재로 쓰는 미나리과 식물)를 얹으니 봄 밥상이 완성됐다. 알싸한 전호 향기가 입 안 가득 봄의 풍미를 전해준다. 풍도랜드 안주인 유연희씨의 고향은 충남 병천이다. 약 35년 전에 들어와 풍도 방문객을 재우고 먹였다. 음식 솜씨가 좋아 꽃 핑계로 밥 먹으러 오는 사람들이 제법 많단다.

풍도의 별미인 전호. 지역에서는 사생이라 한다. 선착장에서 할머니들이 캔 전호와 달래 등을 살 수 있다.

풍도의 별미인 전호. 지역에서는 사생이라 한다. 선착장에서 할머니들이 캔 전호와 달래 등을 살 수 있다.

이튿날, 섬을 떠나기 전에 다시 야생화 정원을 찾았다. 어제보다 훨씬 많은 풍도바람꽃이 파르라니 바람에 떨고 있다. 3월 중순이면 풍도바람꽃, 꿩의바람꽃, 복수초, 노루귀 등으로 울긋불긋 꽃 대궐을 이룰 것이다. 그 모습을 상상하니 흐뭇하다.

여행정보
김경진 기자

김경진 기자

세모가시리 해초를 넣어 끓인 풍도랜드의 아침 밥상.

세모가시리 해초를 넣어 끓인 풍도랜드의 아침 밥상.

풍도 가는 배는 하루 한 번 뜬다. 오전 9시 30분 인천항여객터미널을 출발하는 카페리 ‘서해누리호’가 대부도 방아머리선착장을 찍고 오전 11시 50분께 섬에 도착한다. 풍도에서는 낮 12시 30분에 배가 나온다. 야생화를 제대로 보려면 섬에서 묵어야 한다. 3월 야생화철에는 서산 삼길포항에서 당일치기 배가 뜬다. 민박은 음식 솜씨가 남다른 풍도랜드가 좋다. 트레킹은 선착장~인조 은행나무~야생화 정원~둘레길~붉배~풍도등대~선착장 코스로 섬을 한 바퀴 돈다. 거리는 8㎞, 약 3시간 소요.  

진우석 여행작가 mtswamp@naver.com
시인이 되다만 여행작가. 학창시절 지리산 종주하고 산에 빠졌다. 등산잡지 기자를 거쳐 여행작가로 25년쯤 살며 지구 반 바퀴쯤(2만㎞)을 걸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걷고, 세상에서 가장 멋진 캠프 사이트에서 자는 게 꿈이다. 『대한민국 트레킹 가이드』 『해외 트레킹 바이블』 등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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