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선 HD현대 수석부회장(왼쪽)과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 절친 사이인 둘은 한국형 차기 구축함(KDDX) 사업자 선정을 놓고 경쟁하고 있다. 중앙포토
방위사업청은 27일로 예정됐던 사업분과위원회(이하 사분위)를 개최 이틀 전인 지난 25일 돌연 취소했다. 사분위는 KDDX 상세설계 및 선도함인 1번함 사업자 선정 방식(수의계약 혹은 경쟁입찰)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4월 2일 사분위가 열리지만, KDDX 관련 안건은 상정되지 않는다. 방사청 관계자는 “4월 중순 사분위를 다시 열기 위해 노력 중”이라면서도 “언제가 될지는 확정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KDDX 사업은 2030년까지 7조8000억원을 들여 6000톤(t)급 이지스함 6척을 건조하는 대규모 국책 사업이다. 선체와 이지스 전투 체계에 모두 국내 기술이 적용되는 첫 국산 구축함을 만드는 사업으로 한국의 방위산업 기술을 알릴 기회이기도 하다.
원래 방사청은 17일 사분위에서 사업 방식을 정한 뒤, 4월 2일 국방부 장관(대행)이 주재하는 방위사업추진위원회에서 확정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일부 민간위원이 방사청의 수의계약 방침에 반발하자 논의 시점을 무기한 연기했다.

신재민 기자
방사청이 사업방식을 수의계약으로 정하면 상세설계 바로 전 단계인 기본설계를 맡았던 HD현대중공업이 수주할 가능성이 크다. 반면에 경쟁입찰 방식을 택한다면 한화오션이 유리하다. HD현대중공업은 기밀유출 건으로 2023~2025년 방사청 사업입찰 시 감점(1.8점)이 부과되기 때문이다. 사업자로 선정되는 업체가 상세설계 및 선도함을 수주하기 때문에 후속함(나머지 5척)을 수주하는 데도 용이하다.
수의계약, 경쟁입찰 중 하나의 방안을 택할 경우 승자독식의 구조가 분명하다보니 방사청의 고심이 깊다는 분석이 나온다. 김기원 대경대 군사학과 교수는 “KDDX가 8조원 규모의 국가적 사업인데다 향후 파급력도 크다 보니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며 “특히 K방산의 해외진출을 위해서는 ‘원팀’ 전략이 필요한데, 현재와 같은 승자독식 구조에서는 고배를 마신 기업의 향후 비협조가 우려스러웠을 것”이라고 관측했다.
사분위가 연기되자 업계에서는 KDDX 공동설계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 조용진 방사청 대변인이 지난 25일 국방부 정례 브리핑에서 “함정 업계 간 상생협력 방안을 추가로 보완해 논의한 후 결정할 것”이라고 밝히면서 이런 전망이 더 힘을 받고 있다. 기본설계를 했던 HD현대중공업이 상세설계를 주도하되, 한화오션도 상세설계에 참여하는 형태 등이 거론된다. 현재 ‘선도함 1척 + 후속함 5척’ 식으로 진행되는 발주 형태를 ‘선도함 2척(1·2번함 동시 발주) + 후속함 4척’으로 달리 구성하는 방안도 나온다.

한화오션이 지난해 6월 제주에서 열린 '2024 한국군사과학기술학회(KMIST) 종합학술대회'에서 전시한 한국형 차기 구축함(KDDX) 모형. 연합뉴스
하지만 공동설계가 기술적으로 어렵다는 의견도 적잖다. 이신형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 교수는 “양사의 선박 건조 방식이 상이해 공동설계는 쉽지 않다”며 “기본설계를 했던 업체가 축적된 기술로 상세설계 및 선도함 건조를 맡는 것이 사업 진행에 효율적”이라고 지적했다.
일각에서는 각 그룹의 3세 경영자인 정기선 HD현대 수석부회장과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이 절충안을 낼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중국 견제에 나선 미국이 해군 유지·보수·정비(MRO) 사업에만 10조7300억 원(2023년 기준)을 투입하는 등 K조선에 기회가 온 상황에서 오너들이 윈윈을 추구할 것이라는 기대다.
실제로 양사는 지난해 10조원 규모의 호주 신형 호위함 사업에서 각기 도전했다가 국가 단일팀으로 참가한 일본·독일 업체에 밀려 고배를 마시면서 수출 분야에서 합의를 봤다. 수상함은 HD현대중공업이, 잠수함 등 수중함은 한화오션이 맡기로 업무협약을 맺었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국내 수주전이 과열되면 추후 방사청의 함정 사업자 선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방사청이 상생협력을 요청한 만큼 양사도 방법을 모색할 것”이라고 관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