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산불 한가운데 있었다…불똥이 車 휘감은 '악몽 20분' [현장에서]

지난 29일 경북 안동시 길안면 한 야산이 산불로 인해 검게 변해 있다. 연합뉴스

지난 29일 경북 안동시 길안면 한 야산이 산불로 인해 검게 변해 있다. 연합뉴스

경북 북부지역을 휩쓸었던 ‘괴물 산불’은 지난 25일 오후 단숨에 의성에서 안동을 넘어 청송, 영양, 영덕까지 치달았다. 초속 27m에 달하는 태풍급 돌풍이 의성에 머물러 있던 산불에 풀무질을 하면서다.  

강풍 위에 올라탄 산불이 시간당 8.2㎞ 속력으로 산과 산을 타넘고 있을 때, 기자는 그 경로의 한가운데를 지나가고 있었다. 안동산불 현장지휘소가 차려진 길안면행정복지센터에 있던 기자는 하회마을로 불길이 빠르게 다가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35번 국도를 타고 북서쪽으로 달리던 중 갑자기 사방이 한밤중처럼 어두워지고 불티 섞인 바람이 강하게 차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국도 양옆 야산에서 화염이 회오리를 치며 10여m를 솟구치는 모습이 보이고, 야구공만한 불똥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창밖에는 타이어가 터진 채 덜컹거리며 달리는 차도 눈에 띄었다. 국도를 빠져나가고 싶어도 아래쪽 들판과 도랑은 이미 불바다. '이대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사고가 나 도로 곳곳에 멈춰있는 차들을 피해 20여분을 달려 다행히 위험한 구간을 빠져나왔다. 연기가 걷히고 난 뒤 주변을 둘러보니 급히 위험 지역을 벗어나려는 차들로 기다란 대피행렬이 만들어져 전쟁 피란길을 방불케 했다. 지난 28일 오후 5시를 기해 경북을 휩쓸었던 산불은 진화됐지만, 여전히 그날의 기억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자의 머릿속에 반복 재생되고 있다.

순간의 경험도 이렇게 악몽으로 남아버렸는데 자신의 집과 재산, 심지어 가족까지 눈앞에서 잃어버린 주민들의 트라우마는 오죽할까. 산불에 집을 잃고 돌아갈 곳이 없어 이재민 대피소에 머물고 있는 이들은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다”며 신음하고 있다.


지난 29일 경북 안동시 길안면 길안중학교에 마련된 이재민 대피소에서 심리지원상담이 이뤄지고 있다. 김정석 기자

지난 29일 경북 안동시 길안면 길안중학교에 마련된 이재민 대피소에서 심리지원상담이 이뤄지고 있다. 김정석 기자

 
지난 29일 안동 길안중학교에 마련된 대피소에서 만난 이재민 중 대다수는 구호단체가 마련해 준 텐트 안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몇몇 이재민들은 삼삼오오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지만, 표정에는 침울함과 당혹스러움이 묻어났다.  

이재민 황모(63)씨는 “모두가 살면서 이런 일을 처음 겪었기 때문에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전혀 모르는 상황”이라며 “산불에 타버린 집 정리도 해야 하고 피해 접수도 해야 하지만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은 슬픔에서 헤어나오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정부와 지자체는 갑작스러운 재난으로 충격을 받은 주민들을 위해 심리상담을 지원하고 있다. 심리상담을 받은 주민들은 대부분 산불 당시 겪었던 경험이 자꾸 떠올라 괴롭고 제때 대처를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를 호소한다고 한다. 또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불안감도 높고 ‘내가 뭘 잘못했는데 이런 일이 생기느냐’는 울화도 느끼고 있다.

대피소에서 심리상담을 하고 있는 정경애 국립부곡병원 영남권트라우마센터 팀장은 “산불을 피해 대피한 후 아직 마을 상황을 보지 못한 이들이 많은데, 앞으로 자신의 집과 마을에 가서 처참한 광경을 직접 목격하면 충격이 더 커질 수 있다”며 “피해 주민들의 괴로움과 트라우마를 최대한 낮추기 위해 전문적인 심리상담 지원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난 29일 경북 안동시 길안면 길안중학교에 마련된 이재민 대피소 모습. 김정석 기자

지난 29일 경북 안동시 길안면 길안중학교에 마련된 이재민 대피소 모습. 김정석 기자

 
전문가들은 고령층일수록 트라우마가 더 심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인지 능력 면에서도 훨씬 타격을 입기 쉽고 신체 기능도 떨어져 건강이 악화할 가능성이 높다는 설명이다. 실제 황 팀장은 “산불 피해를 입은 뒤 가족 이름이 떠오르지 않거나 심지어 평생 쓰던 세탁기 사용 방법도 잊어버린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초대형 산불이 난 경북 북부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65세 이상 노인 인구 비중이 높다. 산불 피해로 집을 잃은 이들에 대한 주거 지원, 다시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는 경제 지원은 물론 악몽과도 같을 트라우마와 끝없이 싸워야 할 이들에게 힘이 될 심리 지원도 반드시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