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러블엔터테인먼트 소속 버추얼 걸그룹 '이세계아이돌'이 2023년 8월 발매한 곡 '키딩' 뮤직비디오에서 엔딩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세계아이돌은 오는 5월 15일 고척스카이돔 콘서트 개최를 앞두고 있다. 유튜브 채널 '왁타버스' 캡쳐
최근 인기 가상 아이돌 그룹 악플러에 대해 제작사가 고소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논란이 되고 있다. 일부 누리꾼들은 “얼굴도, 신상정보도 모르는 버추얼 유튜버를 욕했다고 모욕이나 명예훼손죄가 성립할 수 있냐”고 의문을 제기한다.
버추얼 유튜버(Virtual Youtuber·버튜버)는 유튜브 등 동영상 플랫폼에서 2D·3D로 된 가상 캐릭터를 연기하는 창작자를 말한다. 실명과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활동할 수 있는 장점을 앞세워 버튜버 시장은 빠르게 성장 중이다. 미국 시장조사업체 마켓워치는 글로벌 버튜버 시장규모가 2022년 기준 약 2조9028억원에서 2028년 17조5965억원까지로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유튜브 통계 분석 플랫폼 플레이보드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슈퍼챗(현금 후원) 수익 상위 20명 중 6명이 버튜버였다.
버튜버를 향한 관심이 커지면서 악성 댓글 등 각종 문제도 파생하고 있다. 최근 버추얼 걸그룹 ‘이세계아이돌’에 대한 사이버불링(온라인 집단 괴롭힘)도 유사한 사례다. 이세계아이돌은 오는 5월 15일 고척스카이돔에서 단독 공연을 개최할 정도로 팬덤이 두터운 버추얼 그룹이다. 지난달 23일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부산의 굴 포차를 소개하는 유튜브 영상에 등장하는 일반인이 이세계아이돌 특정 멤버와 동일인이라는 소문이 확산했다. 이후 지목된 이세계아이돌 멤버를 향한 외모 비하 등 인신공격이 잇따랐다.

박경민 기자
이에 이세계아이돌의 제작사 패러블엔터테인먼트는 지난달 27일 “온라인상에 이세계아이돌에 대한 모욕, 비하, 거짓된 루머 확산, 조롱 등 사이버 범죄가 지속되고 있다”며 “적극적이고 선처 없는 법적 조치를 취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를 두고 누리꾼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펼쳐졌다. 온라인 커뮤니티 에펨코리아에는 지난달 31일 기준 버튜버 고소 관련 게시글 50여 개가 올라왔다. 한쪽에선 “성도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데 처벌하는 건 이해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다른 쪽에선 “캐릭터 뒤에 사람이 있다”고 반박하는 등 논쟁이 붙었다.
쟁점은 특정성 성립 여부다. 명예훼손이나 모욕죄 혐의가 인정되려면 버튜버와 그가 연기하는 캐릭터가 동일하다는 특정성 요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악플 대상이 가상 캐릭터인만큼 특정성 입증이 쉽지 않다는 게 법조계의 주된 해석이다. 이승우 변호사(법무법인 정향)는 “버튜버 수가 늘면서 관련 사건 의뢰가 많이 들어오고 있다”면서도 “명확한 판례가 확립되지 않아 수사기관에서도 사건 이해와 처리에 난항을 겪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서울 서초구 aT센터에서 열린 ‘2024 코리아 메타버스 페스티벌’의 한 부스에서 관계자가 버튜버(버추얼 유튜버)를 위한 모션 캡처 장비를 시연하고 있다. 연합뉴스
처벌 사례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버튜버 A씨는 지난 2023년 “병X년” 등 욕설을 한 악플러를 모욕 혐의로 고소했다. 과거 다른 개인방송에서 얼굴을 공개하며 활동했던 A씨는 온라인상에 남아있던 당시 영상을 수사기관에 증거로 제시했다. 검찰은 특정성이 성립한다고 보고 피의자 3명에 대해 구약식 벌금형 처분을 내렸다. 이 사건을 대리한 김수열 변호사(뉴로이어 법률사무소)는 “신상정보를 아예 드러낸 적이 없는 버튜버를 모욕한 악플러에 대한 영장을 집행한 사건도 있다”며 “직장 동료 등 주변인이 고소인의 실명과 얼굴 등을 알고 있다면 특정성이 성립할 수 있다는 법리를 제시했다”고 설명했다.
버튜버 원조 격인 일본에선 가상 캐릭터에 대한 명예훼손을 인정하는 추세다. 요미우리신문에 따르면, 2022년 3월 도쿄지방법원은 한 여성 버튜버가 인터넷 사업자를 상대로 악플러의 이름 등 신상정보 공개를 요구한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피고 측은 “원고와 캐릭터는 연령 등의 속성이 모두 달라 캐릭터를 버튜버라고 인식하는 사람은 없다”고 주장했지만, 이즈카 켄(飯塚謙) 재판관은 “캐릭터를 향한 글도 캐릭터 연기자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