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헬리콥터』제임스 리 인터뷰

지난 4일 오전 일찍 서울 중구 부영태평빌딩에서 『레드 헬리콥터』저자인 제임스 리를 만났다. 그는 한국 아버지들이 자녀에게 "사랑한다"고 자주 말해주길 바란다고 했다. 임현동 기자
기존 미국 출판시장에서 리더십 관련 경제·경영서는 백인 남성 전유물이었다. 그런데 하퍼콜린스가 비주류 동양 남성을 리더십 저자로 처음 선택한 거다. 그가 하버드 학부와 로스쿨을 나와, 미국 사회 핵심 주류로 꼽히는 대형 사모펀드 출신 변호사이자 금융인·투자자·기업가·교육가여서 고른 게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이민자 부모를 둔 소수자가 주류 엘리트 사회에 편입하려고 세상의 규칙을 충실히 따르기는커녕 기존 통념에 반하는 다정함(kindness)과 호의(goodwill·회계상 무형자산)라는 생소한 경영 전략을 제시해 기적에 가까운 놀라운 성과를 올렸기 때문이다.

『레드 헬리콥터』는 지난해 출간 후 일론 머스크 전기와 버크셔 헤서웨이 찰리 멍거 책과 함께 베스트셀러가 됐다.
기업 회생으로 주목받은 한국계
엄마의 다정함으로 경영 전략 바꿔
성공 재정의로 삶 변화까지 이끌어
'폭삭' 연상 이민자 부모 희생 뭉클
엄마의 다정함으로 경영 전략 바꿔
성공 재정의로 삶 변화까지 이끌어
'폭삭' 연상 이민자 부모 희생 뭉클
![한 미디어 행사에서 패널로 나온 걸그룹 르세라핌 허윤진과 함께. 르세라핌은 지난해 코첼라 무대로 가창력 논란에 시달렸는데, 허윤진은 이 책 덕에 우울한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한다. [사진 제임스 리]](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504/11/4568d8cf-2fa0-443f-8d76-9b6c23cac47e.jpg)
한 미디어 행사에서 패널로 나온 걸그룹 르세라핌 허윤진과 함께. 르세라핌은 지난해 코첼라 무대로 가창력 논란에 시달렸는데, 허윤진은 이 책 덕에 우울한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한다. [사진 제임스 리]
1막 제임스와 레드 헬리콥터
그땐 왜 이랬는지 스스로도 몰랐다. 그저 애슐리스튜어트가 망하지 않았으면 했다. 본능적으로 알았던 거 같다. 소아과 의사였던 아버지의 진료실처럼, 그리고 영어에 서툰 어머니가 들어서는 순간 바로 어깨를 펼 수 있던 한국 식료품점처럼, 애슐리스튜어트는 단순히 옷을 파는 회사가 아니라 마땅히 받아야 할 존중을 못 받는 흑인 여성들이 자존감을 충전하는 안전지대라는 걸. 세상엔 다정함이 더 필요하다는 걸.
![독자와 어머니 사진을 배경으로 아버지가 즐겼던 노래를 부르는 제임스 리. [사진 제임스 리]](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504/11/f9ec44e9-d348-4f4b-9e32-e11bca5c7ba7.jpg)
독자와 어머니 사진을 배경으로 아버지가 즐겼던 노래를 부르는 제임스 리. [사진 제임스 리]
지금도 그때 나를 바라보던 부모님의 자부심 그득한 눈빛을 잊지 못한다. 어릴 적 누구나 알았지만 다들 잊고 사는 이 단순한 진리를 애슐리스튜어트에서의 출근 첫날 타운홀 미팅에서 즉흥적으로 끄집어내 이렇게 말했다. "다정함(kindness)과 수학(math)을 회사 중심에 두면 난국을 벗어날 수 있어요. "
![지난 2019년 애슐리스튜어트 매장을 찾은 배우 우피 골드버그(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우피 골드버그는 제임스 리를 자기 집에 초대하기도 했다. [사진 제임스 리 X 캡처]](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504/11/3271cd8c-21ab-49e2-8949-9b1455e9b00d.jpg)
지난 2019년 애슐리스튜어트 매장을 찾은 배우 우피 골드버그(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우피 골드버그는 제임스 리를 자기 집에 초대하기도 했다. [사진 제임스 리 X 캡처]
2막 필리스와 한국식료품점
그런데 부당한 소송에 휘말려 아버지의 작은 소아과가 위기에 처하자, 전업주부로만 25년 산 필리스는 셋째까지 모두 대학에 보낸 뒤 영어로 간호사 자격증을 다시 따서 한국전쟁 참전용사를 위한 요양원에서 10년 넘게 근무하며 가정을 지켰다. 남편 유찬, 아니 매튜의 장장 15년에 걸친 파킨슨 투병 치료비도 필리스의 요양원 의료보험 덕분에 가능했다.
백인 사이에서 말없이 미소 짓다 한인 식료품점에 가서야 고갯짓이 달라지던 엄마를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오해했다. 열두세 살쯤 엄마가 철물점에 갔다가 녹 제거제가 영어로 뭔지 몰라 점원으로부터 모욕당한 적이 있다. 레슬링부로 덩치 좋던 나는 점원과 주먹다짐 직전까지 갔다. 사장은 어떻게 번호를 알고 전화를 걸어와 엄마에게 "점원을 해고했다"며 진심으로 사과하고 부끄러워했다.
한참 뒤에 알았다. 엄마는 일상의 수모가 자신을 규정하도록 두지 않고 본인 기준으로 인생을 측정하는 사람이었다. 인종차별과 여성혐오 등 온갖 불공정을 당하고도 그토록 타인에게 다정할 수 있었던 건 내가 나약함으로 착각했던 강인함 덕분이었다. 엄마는 입대하는 이웃 청년을 위해 우리도 비싸서 자주 못 먹는 갈비를 구웠다. 배관공 등 우리 집에 온 누구든 얼음물을 쟁반에 받쳐 제대로 대접했다. 난 이런 다정함의 직접적 수혜자였다. 그리고 엄마의 이런 한국식 정(情)은 우리 삼 남매를 넘어 모두에게 확장됐다. 엄마는 식료품점에서나 겨우 당당한 게 아니라, 자기 세상에서 원래 당당한 사람이었다.
![제임스 리는 애슐리스튜어트에 엄마가 보여준 '다정함'을 비즈니스 전략으로 접목해 성공시켰다. 최근 서울에서의 한 강연에서 엄마와 애슐리스튜어트 흑인 여성에 대해 얘기하는 모습. [사진 제임스리]](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504/11/7bfecf9b-b5c7-45e8-abaf-35ae8b54865a.jpg)
제임스 리는 애슐리스튜어트에 엄마가 보여준 '다정함'을 비즈니스 전략으로 접목해 성공시켰다. 최근 서울에서의 한 강연에서 엄마와 애슐리스튜어트 흑인 여성에 대해 얘기하는 모습. [사진 제임스리]
3막 다시, 제임스와 애슐리스튜어트
엄마는 나를 무조건 사랑했지만 억누르진 않았다. 스스로 선택하고 실수할 여지를 허락했다. 하버드 졸업 후 세상이 하버드 출신에 기대하는 번듯한 직장 대신 연봉 1만2500달러짜리 고교 선생으로 2년 근무할 때도 그랬다. 아버지는 평생 본인 삶의 결핍이라 여긴 안정과 소속감을 자식들만큼은 누리기 바랐다. 그런 아버지에게 "아버지 역경은 내게 위험을 감수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 아니냐, 하버드가 자랑스럽지만 하버드가 되고 싶진 않다"고 대들었다. 집 담보로 학비 댄 입장에서 어이없는 보상에 실망할 법도 한데, 엄마는 아버지를 달랬다. "괜찮아. 내버려 둬요. "
![영화배우 맷 데이먼(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등 하버드 시절 친구들과 함께. 제임스 리는 늘 학교는 물론 사회적 모임에서 언제나 유일한 아시아인이었다. [사진 제임스 리]](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504/11/01f189a9-92c8-4978-a3d8-015f2f1e6835.jpg)
영화배우 맷 데이먼(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등 하버드 시절 친구들과 함께. 제임스 리는 늘 학교는 물론 사회적 모임에서 언제나 유일한 아시아인이었다. [사진 제임스 리]
국선 변호사 되려고 로스쿨에 갔지만 매년 4만 달러씩 쌓이는 빚 앞에서 결국 사모펀드를 택해 수십억 달러 굴리며 전용기 타고 다닐 때도 부모님은 돈이란 세속적 성공을 마냥 좋아하지 않았다. 엄마는 되려 "남들이 네 성공을 진정 기뻐해야 진짜 성공"이라 했다.
리더는 자신의 진정한 가치는 수년, 심지어 수 세대에 걸쳐 평가받는다는 걸 안다. 엄마의 삶으로 그걸 배운 덕분에 난 애슐리스튜어트에서 타인의 주도성을 인정하는 다정함으로 자격 있는 여성들이 잠재력을 발휘하도록 도우며 기업을 성공적으로 회생시킬 수 있었다. 엄마가 없었다면 "너는 나가"라는 배제 대신 "같이 가자"라는 다정함을 감히 떠올리지 못했을 거다.
손익계산서와 달리 삶의 총합인 대차대조표엔 과거 평판이 지워지지 않는 잉크로 쓰여 있다. 인생의 진정한 자산과 부채를 재평가해서, 성공을 재정의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특히 진정한 자신을 드러내길 두려워하는 많은 한국 남성들에게 이 얘기를 꼭 하고 싶다. 내 말이 변화를 이뤄낸다면, 아버지는 이렇게 말할 거 같다. “철중아, 수고했다. 사랑한다. 제임스.”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