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찰이 넘긴 어린이 등 수용자들이 차에서 내리고 있다. 사진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
15일 법조계에 따르면 부산지법 민사11부(부장판사 이호철)는 형제복지원 피해자 유족 강모 씨가 부산시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시가 강씨에게 6300여만원을 배상하라고 지난 9일 판결했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부랑자를 선도한다며 시민과 어린이를 불법 납치·감금해 인권을 유린한 사건이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 결과 12년간 총 3만8000여명이 수용됐고, 이 중 657명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강씨의 아버지는 1985년 형제복지원에 끌려가 2년간 수용됐다. 강제노동에 동원되거나 약물을 투여 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퇴소 후에는 정신질환을 앓았다. 강씨는 지난해 2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로 아버지의 피해 사실을 인정받자, 그해 5월 13일 소송을 제기했다.
부산시 “국가 하부기관 불과”…재판부 “시 조례로 부랑인 단속”
하지만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다. 재판부는 부산시가 1962년 자체적으로 ‘재생원 조례’를 제정해 부랑인 단속 등을 민간에 위탁할 근거를 만들었다고 봤다. 또 국가 공식 부랑인 단속 정책의 근거인 ‘내무부 훈령 제410호’는 1975년 12월 생겨났지만, 부산시는 2년 전인 1973년 부랑인 단속 지침을 마련해 부산시가 주도적으로 불법을 저질렀다고 재판부는 판단했다.
재판부는 “부산시는 부랑인 단속과 그 수용시설에 관한 정책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시행하기 전부터 선행했다”며 “형제복지원 단속·수용, 관리·감독 등 제반 행위 모두 부산시가 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판결로 지자체가 배상 주체자로 부각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법무법인 시그니처 김건휘 변호사는 “그동안 국가만 배상 책임져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는데 이번 판결로 지자체도 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을 법원이 명확히 해줬다”고 말했다.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부산시가 항소 제기를 멈추고 사과하라고 요청했다. 박경보 형제복지원 피해자협의회장은 “부산시의 단독 책임이 인정된 만큼 현재 진행하고 있는 항소심이나 상고 재판을 모두 접고,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손해배상을 해줘야 한다”고 요구했다.

1987년 당시 형제복지원 모습(왼쪽). 2018년 11월 27일 당시 문무일 검찰총장은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들을 만나 피해자들의 진술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중앙포토
형제복지원 손배소 총 76건 진행…부산시·국가 공동배상 28건
부산 형제복지원 관련 손해배상 소송은 4월 기준 총 76건이 진행되고 있다. 이 가운데 부산시 단독 책임을 묻는 소송은 강씨가 제기한 소송이 유일하다. 나머지 75건 중 47건은 국가 단독 배상, 28건은 국가와 부산시의 공동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박 회장은 “부산시와 국가의 공동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 28건 가운데 17건이 1심에서 승소하자 부산시가 모두 항소한 상태”라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부산시의 태도를 접할 때마다 울화통이 터진다”고 말했다. 항소심 17건 가운데 서울고법 민사19-1부가 심리한 소송은 지난 2일 형제복지원 피해자 측의 일부 승소 판결이 내려졌다. 2심 단계에서 부산시의 책임이 인정된 첫 사례다.
부산시는 강씨의 1심 판결뿐 아니라 서울고법의 2심 판결에 대해서도 상고할 예정이다. 부산시 관계자는 “부산시의 책임을 묻는 소송만 있는 게 아니라 국가와 공동 소송도 있어 국가 동향을 보고 있다”며 “모든 소송이 종결된 후에야 부산시의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