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기 이어 중견기업 자금난 확산
상대적으로 신용등급이 낮은 기업들은 ‘미매각’ 우려에 회사채 발행을 미룬다. 대내외 불확실성이 확대되면서 자금이 신용등급 AA급 이상인 우량 채권으로만 쏠리기 때문이다. 지난 15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신용등급 ‘AA-’인 CJ대한통운은 이날 2500억원 규모의 회사채 수요 예측에서 5배가 넘는 1조3700억원의 매수 주문을 받았다. ‘큰손’인 주요 연기금 참여로 흥행했다. 이와 달리 ‘A-’ 등급의 하림지주는 이달 초 수요 예측에서 목표액을 일부 채우지 못했다.
회사채의 금리 격차(신용 스프레드)에서도 온도 차가 드러난다. AA- 등급과 A+ 등급 간 신용 스프레드는 연초 0.373%포인트에서 이달 15일 0.418%포인트로 더 벌어졌다. 신용평가 업계 관계자는 “위험 회피 심리로 우량물에만 수요가 몰려 AA급은 가격이 올랐는데(채권 금리는 하락), 비우량물 가격은 떨어지고 있다”며 “A급 이하 시장에선 냉기가 흐른다”고 말했다. 윤여삼 메리츠증권 연구위원은 “최근 A급 이하인 기업들은 흥행 실패 우려에 채권 발행 일정을 연기하고 있다”며 “미매각 꼬리표가 생기면 기업의 신용도에 영향을 준다”고 덧붙였다.
상당수 중견기업이 이른바 ‘돈맥경화’에 시달리는 것은 단기 자금조달 시장이 ‘홈플러스 사태’의 직격탄을 맞은 영향이 크다. 만기가 1년 미만인 기업어음(CP)과 전자단기사채(이하 전단채) 등 단기 채권 가운데 A3 등급 이하 채권 발행이 막히고 있다. 홈플러스가 기업회생(법정관리)을 신청하기 직전 CP 신용등급이 A3였다. A3 등급은 회사채 기준으로 BBB급으로, 5~6% 이상 고수익을 기대하는 일반 법인과 개인투자자가 투자해 왔다.
서울 강남의 한 증권사 PB센터에선 홈플러스가 지난달 초 기업회생 절차에 들어서자 5% 후반대로 꾸준히 발행했던 일부 전단채 판매를 중단했다.
‘홈플러스 사태’ 이후 전단채 판매 중단… “신용등급 조금만 낮아도 투자심리 위축”

김경진 기자
시중은행 관계자는 “환율 등 글로벌 금융시장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건전성 관리를 강화하고 있다”며 “신용등급이 낮은 기업에 대한 대출은 위험가중자산을 높이는 요인이다 보니 대출을 꺼리게 된다. 담보도 까다롭게 설정해 신용이 안 좋거나 담보가 명확하지 않은 회사는 대출 문턱이 확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김경진 기자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달부터 이달 15일까지 상장을 위한 예비심사를 청구한 기업은 8곳이다. 지난해 같은 기간 25곳(스팩 포함)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3분의 1 수준으로 급감했다.
기업의 부실 징후도 수면 위로 떠올랐다. 연초 이후 유동성 부족으로 법정관리 절차를 밟는 기업이 늘고 있다. 유통 업계에선 홈플러스에 이어 온라인 명품 플랫폼 발란과 골프웨어 브랜드 JDX를 운영하는 신한코리아가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부동산 침체가 길어지면서 시공 능력 순위 300위 이내 종합건설사의 법정관리 신청 개수는 연초 이후 11곳으로 증가했다. 줄도산에 대한 공포가 커지는 이유다. 이윤수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는 “트럼프발 관세전쟁 등으로 국내 경기 침체가 심해지면 자금난으로 어려움을 겪는 기업이 크게 늘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정부가 일시적으로 자금 경색에 빠진 기업에 대해 적극적으로 지원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홈플러스 사태와 최근 미국 관세 충격의 후폭풍으로 시장에서 신용도가 조금만 낮아도 투자 심리가 위축된다. 회사채 시장의 양극화가 극심해졌다”며 “단기적으론 정부가 나서서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정책금융 확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가 대출을 늘리는 방식으로 기업을 지원하는 데는 한계에 다다랐다”며 “업종별로 지원이 필요한 곳을 명확히 구분하고, 국책은행이 적극적으로 투자에 나설 필요가 있다. 이번 추가경정예산안(추경)에도 관련 재원 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