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어찜(淸蒸?魚). 바이두
맛이 좋기도 하지만 아무 때나 맛볼 수 없는 생선이었기에 더욱 귀한 대접을 받았고 그런만큼 예로부터 시어를 팔진미(八珍味) 중의 하나라고 했다. 팔진미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청나라 때는 보통 곰발바닥인 웅장(熊掌), 낙타 등인 타봉(駝峯), 사슴꼬리 녹미(鹿尾), 바다제비 집 연와(燕窩), 상어 지느러미 샥스핀(魚翅), 바다의 인삼인 해삼(海蔘), 물고기 입술(魚脣)과 함께 시어(鰣魚)를 꼽았다.

바다제비 집 연와(燕窩). 바이두
시어에 대한 찬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중국 4대 미녀가 양귀비 서시 왕소군과 삼국지에 나오는 초선인데 이들 미녀에 빗대어 시어를 물속의 초선이라고 했을 정도다.
여기까지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말이니 역시 중국인들 과장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문헌 기록을 보면 꼭 그렇게 생각할 것만도 아닌 듯싶다.
청나라 때 사전인 『강희자전』에는 시어를 방어와 비슷한 기름진 맛(似魴肥美)이라고 풀이했다. 또 청나라 때 미식가로 유명했던 원매가 저술한 『수원식단』에도 시어 요리가 실려있으니 청나라 귀족과 부자들이 앞다퉈 찾았던 명품 생선요리였던 것은 분명하다.

강희자전. 바이두
관련해서 청나라 초의 시인 오가기(吳嘉紀)가 『시어를 낚다(打鰣魚)』라는 시를 지어 황제에게 시어를 진상하기 위해 고생하는 민초들의 애환을 그렸다.
실제 백성들의 고생이 심하긴 심했던 모양이다. 시어가 잡히는 강소성 양주에서 북경까지는 직선거리가 1,300km로 3,000리가 훨씬 넘는다. 이 거리를 쉬지 않고 마차를 달려 이틀만에 도착했다고 한다. 시어를 산 채로 진상하기 위해 북경으로 올라가는 길목 15km마다 대형 수족관을 만들어 놓고 낮에는 기를 꽂고 밤에는 불을 피워 긴급 운송 마차임을 알리며 연인원 수천명이 밤낮을 쉬지 않고 날랐다. 이렇게 힘겹게 보냈지만 북경으로 가는 도중 십중팔구는 죽거나 신선도가 떨어져 황제가 먹을 수 있는 것은 1,000마리 중에서 불과 서너 마리에 불과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썩어도 준치라는 말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황제가 하사한 귀중하지만 맛이 간 시어를 놓고도 사람들은 열광했다. 삭아서 발효된 취두부처럼 삭은 맛이 난다며 냄새나는 생선이라는 뜻의 취어(臭魚)라는 이름을 지어놓고 좋아했다고 한다. 심지어 맛이 간 시어를 맛본 북경의 고위관리가 양자강 주변의 강남을 여행하며 진짜 싱싱한 시어를 먹어 보고는 "이게 무슨 시어냐"며 냄새나는 진짜 시어를 내놓으라고 우겼다는 소리도 전해진다.

시어(?魚). 바이두
그런데 시어는 진짜 어떤 물고기였을까? 우리 조상님들도 궁금했던 모양이다. 조선후기 실학자 정약전이 『자산어보』에 그 비밀을 밝혀놓았다. 정약전은 『유편(類編)』이라는 문헌을 인용해 시어를 준치의 일종으로 보았다. 실제 시어는 강과 바다를 오가는 회유성 물고기이지만 어쨌든 준치, 웅어 등과 같은 청어과 생선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썩어도 준치라고 했으니 비슷한 시어 역시 맛있는 생선이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하지만 진나라 재상 장한이 벼슬마저 버리고 낙향해 먹었다는 송강 농어가 실은 한강 하류에서 많이 잡혔던 생선 '깍정이'였던 것처럼 준치와 비슷한 물고기라는 시어에서도 어딘가 대륙 뻥의 느낌이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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