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문화유산, 하면 경복궁이나 덕수궁 등 조선시대 궁궐이 먼저 떠오르기 마련인데요. 체험학습이나 소풍, 가족 나들이 등으로 궁궐에는 가본 적 있어도 종묘라는 이름은 왠지 낯설죠. 종묘는 조선왕조 500년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곳입니다. 조선시대 문화유산 중 가장 이른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죠. 조선시대 정치사와 유교문화의 정수가 담긴 상징적인 곳, 종묘가 5년여에 걸친 정전 보수 공사를 마치고 지난 4월 완전한 모습을 공개했어요.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 문화유산인 종묘가 지난 4월 20일, 5년에 걸친 대규모 정전 보수공사를 마치고 공개됐다. 황지유(왼쪽)·이현우 학생기자가 이를 기념한 특별전 ‘삼가 모시는 공간, 종묘’를 보고 정전을 거닐며 그 장엄함을 느껴봤다.
설이나 추석 등 명절에는 흔히 조상님께 제사를 지냅니다. 옛날에는 일반 집안뿐 아니라 나라에서도 제사를 지냈죠. 특히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유교를 국가 통치 이념으로 도입하며 유교 원리가 생활 및 사회규범의 근간이 됐는데요. 유교의 예악(禮樂·의례와 이에 수반되는 음악)이 가장 잘 나타나는 것이 종묘(宗廟)와 종묘제례(宗廟祭禮)입니다.
종묘는 쉽게 말해 조선왕조의 사당입니다.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죽은 사람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죠. 추존이란 살아있을 때는 왕과 왕비가 아니었지만 아들이 왕이 돼 사후 왕과 왕비로 모신 거예요. 종묘제례는 종묘에서 행하는 제례의식, 종묘제례악은 그때 쓰이는 음악이죠. 종묘제례는 왕이 직접 행하는 가장 격식이 높고 큰 제사로 왕과 왕세자, 종친은 물론 문무백관 등 제관이 참가했어요.
조선시대에도 중요했던 종묘와 종묘제례는 현재도 국보(정전·正殿)이자 국가무형유산(중요무형문화재)이자 세계문화·무형유산입니다.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에서 관리하죠. 최근 긴 보수공사를 마치고 특별전을 연다는 소식에 소중 학생기자단이 종묘로 향했어요. 전시 ‘삼가 모시는 공간, 종묘’를 기획한 이충선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학예연구사(이하 연구사)를 만난 이현우·황지유 학생기자가 종묘의 탄생부터 궁금증을 쏟아냈죠.
“종묘는 1395년 태조가 한양에 새 나라의 도읍을 정한 후에 지었습니다. ‘궁궐의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단을 두어야 한다’는 주례의 예에 따라 경복궁의 왼쪽에 자리 잡게 됐죠.” 이 학예사의 말에 현우 학생기자가 “왜 종묘와 사직 건설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으며, 죽은 사람을 모시는 공간을 공들여 만든 이유는 무엇인지” 질문했어요.
2020년부터 5년간의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마치고 공개된 종묘 정전.
“사극을 보면 ‘종묘사직’이 중요하다,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장면이 종종 나오죠. 유교 국가이자 농경사회였던 당시, 가장 중요한 곳은 궁궐과 종묘, 사직이에요. 조선이란 새로운 왕조를 세운 태조에게 종묘와 사직을 건설하는 것은 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국가 의례를 확립하는 의미를 가집니다. 유교에서 강조하는 효와 예는 개인을 넘어 국가를 다스리는 기본 원리며, 제사는 유교 이념을 구현하는 행위예요. 종묘는 국가 최고의 사당으로 효를 국가적인 차원에서 실천하는 공간이고, 사직은 땅과 곡식의 신에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백성을 위하는 애민 정신을 보여주죠. 종묘의 건설은 단순히 죽은 사람을 모시는 공간이 아니라 새로운 왕조의 정통성 확립, 국가 의례 정비, 통치 이념인 유교 사상의 구현 등 국가 건설의 핵심이자 상징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종묘는 크게 정전·영녕전을 중심으로 한 제사를 모시는 공간과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나뉘어요. 대지 면적은 5만6000여 평에 달하죠. 주요 건물이자 국보인 정전은 세계에서 가장 긴 목조 단일 건물로 꼽힙니다. 중국 주나라에서 시작된 종묘는 7대까지 모시는 제도였다가 9묘로 확대됐는데요. 이에 중국의 경우 신주를 모시는 신실이 9실에 불과하지만, 조선은 정전의 신실이 총 19칸이나 되죠. 정전 19실에 왕과 왕비 49위의 신주를 모시면서 정면이 매우 길고 수평성이 강조된 독특한 형식으로 나타난 건축 유형입니다.
지유 학생기자가 “종묘를 처음 만들었을 때는 왕이 별로 없었을 텐데 어떻게 이런 큰 규모를 정했는지, 역대 왕의 신주는 차례대로 자리가 정해졌는지” 궁금해했죠. “처음 창건되었을 때는 7칸 규모였는데요. 이후 종묘에 모시는 신주가 늘어나면서 몇 차례 증축을 거쳐 헌종 2년(1836)에 현재의 규모를 갖추게 됐죠. 원래대로라면 대수가 넘어간 신주는 땅에 묻는데, 조선의 종묘에서는 이전 신주를 그대로 유지한 겁니다. 역대 왕의 신주는 차례대로 자리가 정해지며, 정전을 바라볼 때 좌측, 즉 서쪽을 상위로 보아 태조 이후 즉위한 왕부터 순서대로 배치하며 동쪽으로 증축했어요.” 보물인 영녕전의 경우 총 16실에 왕과 왕비 34위의 신주를 모셨는데, 중앙 신실 4칸에 개국 이전 추존왕 4대조를 모시고 동서 양쪽으로 증축해 나갔죠. 서쪽을 상위로 보는 건 같고요.
“조선왕조 왕 27명 중 종묘에 없는 왕은 누구이며 왜 고려 공민왕의 사당도 만들었나요?” 현우 학생기자의 질문에 이 연구사는 “조선과 대한제국 총 27명의 왕과 황제 중, 반정으로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은 종묘에 신주를 모시지 않았다”며 “고려 31대 왕인 공민왕과 왕비인 노국대장공주의 영정을 모신 사당을 공민왕신당이라고 하죠. 종묘에 고려 공민왕의 영정을 모신 이유는 관련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조선 건국의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의도로 해석되기도 합니다”라고 설명했죠.
소중 학생기자단이 향대청에 전시된 종묘 신실 내부 모형을 살폈다.
종묘 남쪽의 정문인 외대문으로 들어와 오른쪽 작은 길로 걸어오면 연못과 함께 망묘루와 공민왕신당이 나옵니다. 망묘루는 묘를 바라보는 곳이란 뜻으로, 종묘제례를 위해 행차한 왕이 정전·영녕전 쪽을 바라보며 선왕을 추모하고 마음가짐을 바로 하던 공간이죠. 이곳에선 ‘삼가 모시는 공간, 종묘’ 특별전이 6월 16일까지 열려요. 전시를 기획한 이 연구사는 “‘삼가다’라는 표현은 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한다는 뜻으로, 예의를 갖춰 조심히 행동하는 모습에 많이 쓰입니다. 종묘 관련 문헌에도 ‘삼가 모신다’라는 표현이 많죠. 종묘는 나라를 위해 조선시대 국왕의 조상에게 가장 최고의 예를 갖추어 제사를 지내는 곳입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이자 인류무형유산이 전승되는 곳으로 현재도 예를 다하여 유산을 보존하고 있어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30주년과 더불어 5년간의 정전 보수공사를 마쳐 이안했던 신주를 예를 다하여 다시 모시는 환안을 기념하는 뜻에서 종묘의 증·개축 및 보수의 역사를 소개하는 이번 전시 제목을 정했죠”라고 귀띔했어요.
지난 4월 20일, 대규모 수리를 마친 종묘 정전이 공개되는 날 특별한 행사가 열렸습니다. 보수공사 중 창덕궁 구(舊)선원전에 임시 봉안했던(이안) 신주들을 본래 자리로 다시 모시는 ‘종묘 정전 환안제’가 그것이죠. 이번 환안제는 1870년(고종 7) 이후 155년 만에 이루어진 것으로, 국가유산청이 『종묘영녕전증수도감의궤』를 바탕으로 장인들과 특별히 제작한 신여와 신연, 향용정을 포함해 전국에서 확보한 총 28기의 가마가 창덕궁 금호문을 나와 광화문과 세종대로, 종로를 거쳐 종묘까지 약 3.5km 구간을 행진했어요. 이어 종묘 정전에서 신주가 무사히 돌아왔다고 고하는 고유제(告由祭)를 열었죠.
“의궤란 일종의 보고서로 종묘를 이렇게 수리하고 증축했다는 내용을 담았어요. 조선 전기 의궤는 임진왜란 등으로 소실돼 실록 등을 참고해 관련 내용을 파악하고요. 조선 후기에는 종묘 관련 의궤가 셋 남아있는데, 이번 행사에 참고한 『종묘영녕전증수도감의궤』는 헌종(재위 1834∼1849) 대인 1835∼1836년 증축 과정을 정리한 것으로, 공사에 참여한 사람 수부터 공사 비용, 지급한 대가 등 관련 내용이 자세히 나오죠. 이안·환안 과정은 그림으로도 실렸어요.”
5년에 걸친 대규모 수리를 마친 종묘 정전이 공개된 4월 20일 오후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주관으로 수리 기간 창덕궁 선원전으로 이안했던 조선 왕과 왕비의 신주를 다시 모시고 무사히 환안했음을 알리는 ‘고유제’를 지냈다. 중앙포토
이 연구사는 신주를 운반하는 신여와 신연, 향용정과 수행원이 줄지어 그려진 그림 ‘이환안반차도’를 가리켰죠. 신여는 궁궐 안에서, 신연은 궁궐 밖에서 신주를 모실 때 사용하는 가마고 향용정은 향합·향로를 태워 가는 가마입니다. 소중 학생기자단은 꼼꼼하게 그려진 가마와 수행원들의 행렬과 참고용 지도를 보며 당시 종묘에서 경희궁까지, 또 경희궁에서 종묘까지 이안·환안했던 모습을 상상하더니 “멋지긴 한데 너무 힘들었을 것 같아요” “저는 못 걸어가요”라며 혀를 내둘렀죠.
“5년이나 보수공사를 한 이유”를 궁금해한 지유 학생기자가 “보수하면서 새로 알게 된 역사적 사실이나 우리가 잘 모르는 비밀의 역사 같은 게 있는지” 물었어요. “종묘 같은 문화유산은 정기적으로 검사해요. 그래서 전에도 담장·지붕·월대 등 부분적으로 보수했었죠. 이번에 2020년부터 5년간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게 된 건 2015년 정전 안전조사 결과 내부 목부재가 틀어지고 기와가 들뜨며 처마선이 변경되는 등 문제를 발견해서죠. 이번 보수 과정에서 1726년 영조 때 종묘 정전을 증축하면서 넣은 상량문이 발견됐는데요. 상량문은 목조 건축 과정에서 최상부 부재인 종도리를 올리는 상량식에 사용되는 축문입니다. 정전 11실 지붕에서 목부재 해체 중 발견돼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 중이죠. 이 상량문 내용과 영조대 증수 과정을 기록한 『종묘개수도감의궤』 내용이 일치해 영조대에 작성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이충선(왼쪽) 학예연구사가 소중 학생기자단에 문헌을 통해 본 헌종 대 신주 이동경로를 설명했다.
조상을 모시는 종묘는 나라의 근본이 되는 중요한 곳임을 밝히며 정전의 증수 경위와 국가의 번영을 기원하는 내용이 담긴 상량문 사진을 가리킨 이 연구사가 “본래 목재에 홈을 파고 넣어 밀봉해 어디에 있는지 잘 알 수 없는데, 이 상량문은 보이는 곳에 있어 바로 찾을 수 있었다”고 하자 소중 학생기자단은 “다음에 영녕전 등 보수공사 때 또 다른 상량문 등이 발견됐음 좋겠다”고 입을 모았죠. 이와 같은 보수공사나 신실을 늘리는 증수공사는 조선시대에도 몇 차례 이루어졌습니다. 전시를 통해 조선시대 증수 역사 및 의궤에 실린 기록을 간단히 살필 수 있죠.
임진왜란 당시 경복궁과 함께 불타버린 종묘는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며 중건됩니다. 이후 조선의 역사가 깊어지는 만큼 모셔야 할 신주가 늘어나며 1667년(현종 8), 1726년(영조 2), 1836년(헌종 2) 세 차례에 걸쳐 증수돼요. 지금 우리가 보는 종묘의 규모는 헌종 때 증수된 겁니다. “임진왜란 이전 종묘의 모습은 『국조오례의서례』에 실린 그림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정확한 모습은 알 수 없다”고 한 이 연구사는 “광해군 때 종묘를 중건하며 조선의 전통을 유지하는 것으로 결정하고, 이후로도 기존 제도를 따랐다”며 “이번 보수공사 역시 사람의 손으로 만드는 전통기법을 원칙으로 최대한 옛 자재를 보존·보강해 다시 쓰며 수제 기와를 올리고 수제 전돌을 까는 등 종묘의 역사성을 지키고자 했다, 이를 위해 각 자재의 원래 위치를 정확히 기록·파악하는 게 매우 어려웠던 점 중 하나”라고 설명했죠. 5년간의 전면적인 정전 보수공사 과정은 영상으로 볼 수 있었어요.
망묘루에서 열리는 ‘삼가 모시는 공간, 종묘’ 특별전을 기획한 이충선(왼쪽) 학예연구사를 인터뷰하는 이현우(오른쪽)·황지유 학생기자.
상량문 등의 기록 얘기에 현우 학생기자가 “종묘에는 왕의 업적이나 일생에 대한 기록도 함께 있는지” 궁금해했죠. “종묘는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왕의 업적이나 일생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보관하는 곳은 아닙니다. 다만 국왕과 세자, 왕비와 세자빈 등을 책봉하거나 그들에게 생전의 공덕을 기리며 묘호·시호 등을 올릴 때 주는 교명·죽책·옥책 등을 함께 보관했는데, 이 유물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주로 소장돼 있습니다.”
조선시대 종묘의 건축부터 신주의 이·환안 과정, 최근 보수공사까지 총 3부 구성의 전시는 정전 지붕 잡상 소개로 마무리돼요. 나쁜 기운을 막기 위한 상징물이자 장식 기와로 지붕 양 끝 추녀마루 위에 올렸죠. 대당사부(삼장법사)를 비롯한 서유기 등장인물과 토신(土神)을 형상화한 것으로 알려졌어요. 보통 지붕 위에 있어 자세한 생김새를 몰랐던 잡상을 복제품으로 자세히 관찰한 소중 학생기자단은 망묘루 누마루에 올라 열린 창을 통해 잠시 조선의 왕처럼 정전과 영녕전 쪽을 굽어본 뒤 툇마루에 앉아 이 연구사와 인터뷰를 이어갔죠.
현우 학생기자가 “종묘는 어떤 특징 때문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는지” 물어봤어요. “종묘는 유교 왕실 사당의 탁월한 사례로 건물 배치와 건축양식을 16세기 중건 이후 온전하게 보존했으며, 매년 정기적으로 거행하는 종묘제례를 통해 무형유산의 중요한 요소가 지속되고 있죠. 의례 공간과 의례 준비 공간으로 구성된 물리적 형태와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된 음악과 무용 등 전통 의례를 모두 전승·보존해 높은 수준의 진정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동아시아 목조 건축물처럼 해체 및 재건 등 여러 차례 복원 작업이 이뤄졌지만, 재료와 기술에 대한 철저한 존중을 바탕으로 한 진정성이 있죠. 종묘와 종묘제례가 유네스코 세계유산과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이들이 우리나라를 넘어 인류가 공유하고 보존해야 할 보편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백 년간 전승되어온 살아있는 문화유산이고, 이는 인류의 다양한 문화와 창의성을 보여주죠.”
멋들어진 향나무가 자라는 작은 섬이 있는 망묘루 앞 연못(중연지)을 둘러본 소중 학생기자단. 종묘에는 3곳의 연못이 있다.
설명을 듣던 지유 학생기자가 “종묘제례악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궁금해하며 “왕이 하는 제사인 종묘제례는 일반적으로 우리들이 하는 제사와 많이 다른지” 질문했죠. 이 연구사는 “종묘제례악은 종묘제례를 지낼 때 사용한 음악(樂)과 노래(歌)와 춤(舞)을 총칭한다”며 “종묘제례는 왕이 친히 받드는 가장 격식이 높고 큰 제사이자 왕실에서 거행되는 장엄한 국가 제사로 존엄한 길례”라고 설명했어요.
유교사회에는 길례(吉禮)·흉례(凶禮)·군례(軍禮)·빈례(賓禮)·가례(家禮)의 다섯 의례(五禮)가 있는데 그중 길례인 제사를 으뜸으로 여겼으며, 이를 ‘효’ 실천의 근본으로 삼았습니다. 정전에서는 사계절의 각 첫 달에 정해진 날과 납일(臘日·동지(冬至) 후 세 번째 미일(未日))을 합쳐 1년에 다섯 번, 영녕전에서는 봄·가을 정해진 날에 두 번 제례를 행했죠. 이외에도 홍수·가뭄 같은 자연재해나 질병·전쟁 등이 발생했을 때와 책봉·관례·혼례·흉례를 비롯해 천신(薦新·새로 농사지은 과일이나 곡식을 먼저 사당에 올려 조상에게 감사를 전하는 예)과 천금(薦禽·사냥해서 잡은 짐승을 먼저 올리는 예) 등이 있을 때도 종묘에서 제례를 지냈어요. 종묘제례악은 세종대에 아악을 정비한 후 만든 보태평(保太平)과 정대업(定大業·현재 각각 11곡)이라는 음악을 중심으로 조상의 공덕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며 문덕과 무공을 칭송하는 일무(佾舞·문무와 무무)를 추죠.
세계유산인 종묘에서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지내는 종묘제례 모습. 종묘제례는 왕이 받드는 국가 제사로 가장 격이 높고 큰 행사였으며, 현재는 2006년부터 국제문화행사로 격상돼 거행되고 있다. 중앙포토
조선왕릉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소중 학생기자단은 그럼 왕릉에서도 제사를 지내고 종묘에서도 제사를 지낸 건지 궁금해했죠. “유교 제사를 간략히 설명하면 신을 불러 모신 후 음식을 바치고, 그 공덕에 감사하고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라고 한 이 연구사는 “역대 국왕·왕비들의 신주를 모신 종묘와 시신을 모신 왕릉의 제사는 대상은 같지만, 성격이 매우 다르다”고 강조했죠. 종묘 제사는 유교 경전에 근거를 둔 제사 중 가장 크고 중요한 제사이고 왕릉 제사는 세속의 관습이나 인정에 따라 행하는 속제에 속한다는 거예요.
“고종이나 순종과 같이 일제가 침략한 때에도 종묘제례가 유지됐는지” 물은 현우 학생기자는 “왕이 없는 지금은 어떻게 제사를 지내는지” 알려달라고 했죠. 이 연구사는 “일제강점기에는 유지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해방 이후 다시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렀고, 현재는 매년 5월 첫째 주 일요일(춘향대제)과 11월 첫째 주 토요일(추향대제)에 종묘에서 종묘제례를, 왕릉에서는 돌아가신 날에 기신제를 지낸다”고 설명했죠.
왕이 종묘제례를 거행할 때 참석자들의 자리 배치를 레고 조각 2만여 개로 구현한 ‘레고 오향친제반차도(五享親祭班次圖)’를 보는 소중 학생기자단.
“사실 제사는 사라지는 추세인데 어린이·청소년들이 종묘를 찾아오고 지켜야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지유 학생기자의 질문에 이 연구사는 “종묘는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조선의 건국이념과 왕조의 정통성을 상징하고, 조상에 대한 공경과 효를 근본으로 삼았던 유교문화의 핵심을 보여주는 공간”이라고 강조했죠. “조상을 기리는 것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문화권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보편적인 가치라고 생각해요. 제사 문화는 사라지고 있지만 그 가치까지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어린이들이 종묘에 와서 단순히 제사의 형식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역사를 배우고, 조선이 중요시한 가치인 효와 예를 배울 수 있다고 봐요. 우리나라의 역사와 전통문화를 이해하고 문화유산을 지켜나가야 하는 책임감을 배울 수 있는 유산이라고 할 수 있죠. 긴 보수공사로 종묘에 처음 온 어린이들이 많을 텐데, 먼저 망묘루에 들러 전시를 통해 종묘 증수의 역사와 신주의 이·환안, 보수공사 과정과 복제품으로 마련한 정전 지붕의 잡상을 살핀 뒤, 종묘 정전을 직접 걸어 보며 그 장엄함을 느껴보세요.”
종묘는 궁궐 등과 달리 시간대별로 관람 시간이 정해져 있고, 해당 시간에 입장해 종묘해설사와 함께 1시간 정도 둘러볼 수 있어요. 토·일·공휴일과 문화가 있는 날에는 자유 관람도 가능하죠. 망묘루에서 나온 소중 학생기자단은 바로 옆 향대청에 들어갔어요. 향대청은 향과 축문을 보관하던 곳으로 정면 9.5칸의 건물 앞에 행각이 놓여 남북으로 긴 뜰을 갖췄죠. 이곳에서는 종묘 관련 상설전시가 열리고 있어요. 소중 학생기자단은 키오스크로 세계유산 종묘에 관한 내용을 살피고, 복제품으로 신실의 구성과 종묘제례 제상의 배치를 알아봤죠. 신실은 신주를 모신 신주장을 중심으로 좌우에 책과 보(寶·도장)를 보관하는 책장과 보장을 두고 신주장 앞에 제례 때 신주를 옮겨 모시는 신탑과 궤를 두는 구성이에요. 종묘제례악을 직접 들어보는 코너에선 지유 학생기자가 “학교 수업 시간에 들어본 음악이 있다”며 현우 학생기자에게 권하기도 했죠.
현재는 종묘 관련 전시관이 된 향대청 앞에는 행각이 길게 자리하고 있다.
향대청에서 나온 소중 학생기자단은 재궁 가는 길에서 해설사와 합류했습니다. 재궁은 왕과 세자가 목욕재계하며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고 제사를 올릴 준비를 하던 곳이죠. 재궁을 지나면 왕의 길인 어도(御道)는 정전 동문 앞으로 연결됩니다. 제례음식을 마련하며 평소 제사용 집기를 보관하는 전사청, 제사에 사용하는 물을 긷는 우물인 제정, 제례음식을 검사하는 찬막단과 제물로 바쳐질 짐승들을 검사하는 성생위를 눈으로 훑어보고 종묘 관리인(수복)들이 사용했던 수복방 옆 동문으로 들어서면 정전이 나타납니다.
종묘 정전은 국가를 상징하는 중요한 건물이지만 건축 자체는 화려하지 않고 단청 또한 절제돼 단순하면서도 숭고한 품위와 장중함을 보입니다. 화강석으로 기단을 쌓은 상월대 위에 신주를 모신 19칸의 신실을 중심으로 양쪽에 협실이 각 3칸, 동·서월랑 각 5칸이 설치됐어요. 각각 제기를 보관하는 동협실과 제사를 준비하는 퇴간·동월랑, 신여·병풍 등을 두는 의물고로 쓰인 서협실과 창고처럼 지어진 서월랑이죠. 정전의 신실에는 1실 태조고황제·신의고황후·신덕고황후부터 19실 순종효황제·순명효황후·순정효황후까지 공덕이 있는 왕과 황제 19위와 왕비·황후 30위의 신주가 모셔졌어요.
사방을 담장으로 두른 정전의 구역에는 종묘제례가 거행되는 넓은 월대가 설치됐습니다. 가로 109m, 세로 69m의 월대에는 거친 박석을 깔고 신도와 어도, 제관들의 위치를 알려주는 판위에는 전돌을 깔았죠. 개국공신 등 83위의 위패를 모신 공신당 및 생활과 밀접한 일곱 신을 모신 칠사당이 정전의 남신문 동서쪽에 자리합니다. 남신문은 3칸에 맞배지붕을 올린 삼문의 형식이지만, 혼령들이 출입하는 신문(神門)으로 사용하며 정전 신실까지 월대를 가로지르는 신도로 연결됐죠. 국왕을 비롯한 제례에 참여하는 인원들은 동문을 통해 출입하고, 제례악을 연주하는 악공과 춤추는 일무원들은 서문을 이용했어요.
향대청은 제사 전날 왕이 종묘제례를 위해 내린 향·축문·폐백 등을 보관하는 곳으로 제관들이 대기하기도 했다.
서문으로 나오면 영녕전으로 가는 길 건너편에 제례악을 준비하는 악공청이 보이죠. 영녕전 악공청 또한 영녕전 서쪽에 있어요. ‘왕실의 조상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다’라는 뜻의 영녕전(永寧殿)은 전체적으로 공간 형식은 정전과 유사하지만, 정전보다 규모가 작죠. 태조의 4대 조상인 추존 목조·익조·도조·환조와 그 왕비의 신주를 모신 가운데 4칸을 중심으로 이보다 지붕이 낮은 동·서익실 각 6칸을 세웠어요. 영녕전에는 정전에서 옮겨온 왕과 황제 15위와 왕비·황후 17위, 마지막 황태자와 황태자비의 신주가 모셔졌죠.
외대문에서 정전에 이르는 길에는 널찍하고 거친 박석이 깔린 삼도(三道)가 길게 나 있습니다. 동측은 왕이 다니는 어로(御路), 서측은 세자로며 양옆보다 약간 높은 가운데 길은 조상신이 다니는 신로이므로 걷지 않는 게 예절이죠. 삼도를 따라 나오며 마지막까지 예와 효에 대해 배운 소중 학생기자단은 현재에 이른 종묘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
동행취재=이현우(인천 중산초 4)·황지유(서울 봉은초 6) 학생기자
종묘 정문인 외대문으로부터 정전으로 이어지는 삼도의 가운뎃길은 조상신이 다니는 신로이므로 걷지 않는 게 예절이다.
「 조선 왕과 왕비들의 신주가 잠들어 있는 곳, 종묘를 다녀왔습니다. 종묘는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가 만들었죠. 조선은 유교를 중심으로 세워졌고, 유교에서는 효가 중요했기에 궁궐 왼쪽에 역대 왕들의 신주를 모시는 종묘를 지은 겁니다. 종묘는 5만6000평이나 돼 엄청 넓은데, 건물은 별로 없고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요. 도시 한복판 신비로운 숲속 종묘는 정전·영녕전처럼 제사를 지내는 공간과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나뉘어요.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복구해 임진왜란 전 종묘의 모습은 아무도 모른다는 게 아쉬웠죠. 전쟁은 인류의 목숨도 위협하지만 세계의 문화재도 파괴하는 몹시 나쁜 것이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도 어서 전쟁을 멈춰야 한다고 생각해요. 조선왕조의 역사가 길어지면서 돌아가신 왕들이 많아져 정전과 영녕전은 계속 커졌는데요. 정전 등은 어떤 공간인지 알려주는 설명과 축소 모형이 함께 있고, 모형은 만져볼 수 있는 데다 점자도 있어 장애인도 함께 볼 수 있게 만든 것 같아요. 종묘를 둘러보며 할아버지 제사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 집에는 사당은 없지만요. 제사가 돌아오면 할아버지 생각이 더 많아지고 너무 보고 싶어요. 그런 후손들의 마음 때문에 조선왕조는 무너졌지만, 종묘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게 아닐까요.
-이현우(인천 중산초 4) 학생기자
처음 가본 종묘의 망묘루에서 이충선 학예사님과 만나 ‘삼가 모시는 공간, 종묘’ 전시를 보고 종묘와 영녕전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5년이란 긴 공사를 하며 정전 11실에서 영조시대 종묘 수리 상량문을 발견한 게 무척 놀라웠죠. 왜 11실에서 발견됐는지 의문과 함께 다른 곳에도 있을 거 같은데 더 발견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종묘는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곳인데 왜 고려 공민왕의 영정이 있는지 궁금했는데, 짧게 설명을 들으니 자세히 알고 싶어졌어요. 학예사님 인터뷰를 마치고 종묘를 둘러보는데, 아무래도 오랜만에 문을 열어서인지 관람객이 많아 해설사님의 설명을 잘 듣지 못한 건 아쉬웠죠.
-황지유(서울 봉은초 6) 학생기자
」 글=김현정 기자 hyeon7@joongang.co.kr, 사진=임익순(오픈스튜디오), 자료=국가유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