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동혁 감독은 지난 9일 오전 서울 용산구 드래곤시티에서 열린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게임 시즌3(감독 황동혁) 제작발표회에서 "시즌4는 없지만 스핀오프 같은 것을 해볼까 생각한다"며 파생작 가능성을 열었다. 사진 뉴시스
넷플릭스 인기 시리즈 ‘오징어 게임’의 황동혁 감독은 최근 시즌3 제작발표회에서 “스핀오프 같은 걸 해볼까 하는 생각도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흥행한 한 편의 이야기를 넘어, 등장인물과 설정 하나하나가 또 다른 이야기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었다.
콘텐트 업계에서는 이처럼 하나의 이야기를 다른 매체로, 새로운 이야기로 확장하는 사례들이 늘고 있다. 역대 청불영화 최고 흥행작인 ‘내부자들’(2015)은 현재 드라마 시리즈로 제작 중이다. 드라마의 흥행을 기반으로 '축약본'과 같은 영화를 만드는 사례는 있었지만, 그 반대는 드문 경우다. 영화에서 백윤식이 연기했던 정치 설계자 이강희 역을 송강호가 맡아,1980~90년대를 관통하는 사건들을 촘촘히 풀어낼 예정이다.

영화 '내부자들' 포스터. 시리즈물에선 배우 송강호가 주연으로 나선다. 사진 하이브미디어코프, 뉴스1
2022년 방영 당시 최고시청률 26.9%를 기록한 JTBC ‘재벌집 막내아들’도 속편이 나온다. ‘인생 2회차를 사는 판타지 드라마’라는 기본 서사 위에 새로운 캐릭터를 더할 것으로 보인다. 아티스트컴퍼니와 아티스트스튜디오는 “기획 초기부터 해외 시청자들과의 정서적 접점을 고려한 스토리 라인과 캐릭터 설계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박훈정 감독은 영화 ‘마녀’ 시리즈(2018, 2022)와 세계관을 공유하는 디즈니플러스 시리즈 ‘폭군’을 지난해 선보였다. 처음으로 긴 호흡의 연출을 경험한 박 감독은 “각 캐릭터들의 매력을 더 깊이 조명할 수 있었다. 포맷과 수위 면에서 보다 자유롭다는 점이 좋았고 다양한 시청자와 만나게 되어 새롭고 감사한 마음”이라고 전했다.

2018년 영화 '마녀'는 2022년 시즌2로 나왔고, 2024년 스핀오프 시리즈 '폭군'으로 제작됐다. 사진 영화사 금월, 페퍼민트앤컴퍼니, 스튜디오앤뉴, 디즈니플러스
이처럼 OTT 중심의 콘텐트 생태계가 자리 잡으면서, 한 번의 소비로 끝나지 않는 ‘반복 가능한 이야기’는 중요한 경쟁력이 됐다.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드는 세계관 공유, 스핀오프 전략은 충성도 높은 팬덤을 확보하고 IP(지적재산권) 수명을 연장하는 효과적인 방식으로 자리잡고 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콘텐트 소비가 팬덤 중심으로 변화했다. 세계관에 깊숙이 빠져든 시청자들이 관련된 다른 콘텐트들도 소비하는 구조다. 스핀오프나 IP의 멀티 유즈 전략이 훨씬 더 유용해지고 중요해진 시점”이라고 설명했다.

'원경'은 남편 태종 이방원과 함께 권력을 쟁취한 원경왕후를 주인공으로 했다. 사진 tvN, 티빙
CJ ENM은 2021년 티빙과의 협업 확대를 발표하고 드라마 유니버스 확장을 진행 중이다. 올 1월에는 ‘원경’의 tvN 방영 도중 티빙에서 프리퀄 ‘원경: 단오의 인연’을 선보이는 새로운 방식을 시도했다. 이방원과 원경의 애증을 그린 본편 분위기와는 다르게, 어떻게 두 사람이 젊은 시절 만나 사랑에 빠졌는지를 보여준 작품이다.
지난해 10월 공개한 티빙 ‘사장님의 식단표’는 tvN ‘손해 보기 싫어서’의 서브 커플 이상이·한지현의 이야기를 떼어낸 스핀오프다. 본편 공개도 전에 스핀오프 소식을 먼저 공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티빙은 “기획 단계에서부터 스핀오프나 프리퀄을 기획하고 이를 빠르게 선보임으로써 이용자들에게 작품에 대한 몰입도를 높이는 경험을 선사하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사장님의 식단표'는 원작 '손해보기 싫어서'의 웹소설 작가 남자연의 커플 스토리를 다뤘다. 사진 tvN, 티빙
티빙은 ‘비밀의 숲’ 시리즈(2017, 2020)의 비리검사 서동재를 앞세운 스핀오프 ‘좋거나 나쁜 동재’도 제작해 화제를 모았다. 본편에선 조연이었던 서동재를 극의 중심에 놓고, 인물의 변화를 깊게 파고들어 호평받았다.
정 평론가는 “예전에는 주인공 중심의 이야기가 일반적이고 시청자들도 주인공에 몰입하는 것이 당연했으나, 지금은 조연을 더 좋아하는 시청자들도 많다. ‘스타워즈’가 초기에 주인공 중심으로 시작했다가, 이후 주변 인물들까지 하나하나의 서사를 갖게 된 것처럼 K-콘텐트도 그런 방식으로 계속 확장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또 “주변 캐릭터 하나하나에도 서사를 부여하는 방식이, 결국 전체 세계관을 풍부하게 만든다”고 덧붙였다.

'비밀의 숲'의 조연 서동재를 주연으로 내세운 '좋거나 나쁜 동재'. 사진 tvN, 티빙
파생작은 새로운 연출자의 데뷔 기회로도 작용한다. 지난달 종영한 tvN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생활’은 이민수PD의 첫 장편 데뷔작이다. 본편인 tvN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연출했던 신원호 감독은 크리에이터로 참여했다. 배우 전도연이 주연한 넷플릭스 액션 영화 ‘길복순’(2023)의 조감독이었던 이태성 감독은 스핀오프 영화 ‘사마귀’로 첫 메가폰을 잡는다. ‘길복순’의 변성현 감독은 각본에 참여했다.
플랫폼을 가리지 않는 세계관 확장 전략은 글로벌 콘텐트 시장에서도 주요 흐름이 됐다. 액션 블록버스터 ‘존 윅’ 시리즈의 세계관을 공유하는 영화 ‘발레리나’는 8월 중 국내 개봉한다. ‘존 윅’의 스핀오프 드라마 ‘컨티넨탈’은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에서 2023년 공개된 바 있다. 영화 ‘더 배트맨’의 세계관을 이어가는 드라마 ‘더 펭귄’은 미국에서 먼저 공개돼 입체적이고 매력적인 빌런 서사로 호평받았다. 국내에서는 쿠팡플레이를 통해 볼 수 있다.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생활'은 언젠가는 슬기로울 의사생활을 꿈꾸는 레지던트들을 주인공으로 했다. 사진 tvN
‘킬러들의 쇼핑몰’ 등을 만든 제작사 메리크리스마스의 유정훈 대표는 지난달 언론과의 만남에서 “이제는 하나의 콘텐트를 설계할 때부터 유니버스를 고민한다. 새로운 이야기를 찾는 것 보다 기존 이야기를 확장하는 것이 세계적인 흐름에도 맞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콘텐트의 세계관 확장 전략이 지상파의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도 있다고 봤다. 공희정 드라마 평론가는 MBC에서 지난해 ‘수사반장’(1971~1989년)의 프리퀄로 ‘수사반장 1958’을 제작해 10% 시청률을 돌파했던 사례를 들었다. “검증된 인기 IP를 가장 많이 보유한 곳이 지상파다. 시청자들의 향수를 자연스럽게 자극하고, OTT에 올라와 있는 옛날 드라마와 함께 시청률·화제성을 같이 가져갈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최불암으로 대표되는 '수사반장'. '수사반장'의 프리퀄에선 배우 이제훈이 주연을 맡았다. 사진 MBC
최영균 대중문화평론가는 “기존 이야기를 재해석하는 리메이크와 달리 스핀오프는 새로운 제작진과 요즘 배우들로 그들만의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며 “할리우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런 전략을 적극적으로 사용해오고 있었다. 국내 지상파들도 다양한 방식의 스핀오프 제작에 더 과감하게 나설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