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복 왔을 때 마음가짐이 중요…1년짜리 운, 10년 될 수도
테헤란의 벤처 역술가에서 K-컨설턴트로 해외 시장 개척 꿈꿔
관상가를 찾는 손님들의 주문은 제각각이다. 자식이 명문대에 갈 수 있을지, 지금 투자하면 이익을 낼 수 있을지, 임원 중에서 누굴 자르고 누굴 승진시켜야 할지, 과연 내가 대통령이 될 수 있는지. 이래저래 질문은 달라도 속내는 같다.
돈, 재물, 운. 그 흐름을 알고 싶어 한다. 그래서 관상가는 얼굴을 보되, 얼굴만 보지 않는다. 얼굴에서 한 사람의 인생을 읽고 표정에서 마음의 굴곡을 짚는다. 이목구비의 생김새만 갖고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건 관상이 아니다. 심상(心想)이 빠진 관상은 그냥 구경거리다. 통계다. 일란성 쌍둥이의 삶이 과연 똑같던가?

김민정 관상가는 내로라하는 정재계 인사들의 관상을 봐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심상이 곧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게 그의 원칙이다. 김정훈 기자
왕십리 스승 밑에서 관상 배운 여중생
내로라하는 유수의 기업인이나 여야 불문 정치인이 그를 찾는다. 지면에 거론할 수 없지만 기자가 확인한 정치인 중에는 정계를 주름잡은 인사도 넘쳐난다. 대선 후보는 말할 것도 없다.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기업인도 상당수. 그는 30만 명 회원을 둔 한국역술인협회의 수석부이사장이다.
스승은 고(故) 최철웅 선생이다. 언사가 올곧아 권력의 고초도 당했다. 전두환의 기세가 꺾일 것이다, 조만간 백담사에 기거한다고 예견해서다. 최철웅 선생은 밑에 제자를 두지 않는 독고다이였다. 퇴역한 군 고위 장교나 공직자들이 관상을 배워보겠다고 찾았으나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손님도 고관대작이 아니면 안 받았다. 지인 추천을 받아도 급수가 돼야 했다. 왕십리에 있는 그의 자택은 문턱이 높기로 유명했다.
김민정 관상가는 중학생 때 그 최철웅 선생을 만났다. 무슨 연유였을까.
그는 1971년 상류층이 산다는 서울 동부이촌동에서 나고 자랐다. 부친이 무역사업을 했고 모친은 요식업 프랜차이즈 사업으로 유례없는 경제 호황기에 성공을 일궜다.
하지만 1986년 사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부친은 알코올 중독과 당뇨, 신장 투석까지 겹쳐 쓰러졌다. 실질적인 가장이 된 모친이 지인의 소개로 어렵사리 한 관상가를 찾아갔다. 그게 최철웅 선생이었다.
답변은 냉혹했다. “좋은 얘기해주고 싶지만 사업이 다 안 될 거요.” 짧게 침묵이 흘렀다. 모친이 마음을 접고 일어서려는 찰나 선생이 덧붙였다. “하지만 따님이 집을 살릴 수도 있소. 한 번 데리고 오시오.”
가족은 운명공동체라는 얘기가 있다. 관상도 그렇다. 자신의 관상이 안 좋아도 배우자의 관상에서 덕을 볼 수 있다. 자식의 관상이 부모에게 운을 가져올 수도 있다.
2007년 대선 때다. 한나라당에서 박근혜와 이명박 간 계파 싸움이 한창이던 때 역술계에는 이런 말이 돌았다. ‘부인(김윤옥) 관상이 너무 좋아서 이명박 후보가 당선될 것이다.’ 같은 맥락이다.
16세의 중학생은 모친에 이끌려 선생을 대면했다. 그리고 5년 동안 왕십리를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최철웅 선생은 중앙대 법대 출신이다. 한때 사법고시를 준비했지만 역학에 매력을 느껴 길을 틀었다. 그래서 유독 학문적 깊이를 중시했다. 각종 고서(古書)는 물론이요, 신문도 달달 읽게 했다. 관상의 틀만 공부해선 안 된다는 이유였다. ‘한 인간을 알려면 그 인간이 속한 시대와 사회도 알아야 한다. 배경을 모르면 인간을 읽을 수도 없다.’
그러다 기사를 툭 던지며 물었다. 물의를 일으킨 정치인이나 기업인, 연예인들 내용이다. “왜 이 기사가 나왔을까. 생각해보거라. 이 사람의 관상 때문인가?” 내방한 손님을 지켜보게 하거나 직접 관상을 보게도 시켰다. 제자가 분석을 내놓으면 스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왜 틀렸을까? 어떤 징후를 놓쳤나?”
얼굴의 형태(보상), 말투의 기운(언상), 분위기(인상), 손금(수상), 심지어 눕는 자세까지 모두 판단하라고 했다. 미세한 주름 한 줄조차 해독의 대상이었다.
김민정 관상가는 스무살이 되자마자 독립했다. 가세가 기운 마당에 언제까지 스승 아래서 머물 수는 없었다. 간판을 내건 지역은 강남의 테헤란로.
“어머니께서 새벽마다 전철역 앞에서 전단을 돌리셨다.”
지금처럼 SNS나 유튜브가 없던 시대다. 대강의 약력이 적힌 전단 하나가 유일한 광고 수단이었다. 그런데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다.
‘말이 관상가고 선생이지, 터놓고 얘기하면 약관 아닌가. 근데 그게 또 신묘하다더라.’
![김민정 관상가가 정치권에서 받은 표창들. 박근혜·문재인·이재명 정부 등 진영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정치인이 그를 찾았다. [중앙포토]](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506/22/9b27c09a-f575-4d4c-956a-6401ad3698ae.jpg)
김민정 관상가가 정치권에서 받은 표창들. 박근혜·문재인·이재명 정부 등 진영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정치인이 그를 찾았다. [중앙포토]
테헤란로의 벤처 역술가로 거듭나
테헤란로, 그것도 벤처의 상징인 야후코리아 인근의 철학관은 청년 사업가들로 문전성시였다. ‘여기에 투자하면 잘될까요?’, ‘얘네 이거 얼치기들 같은데 믿어도 됩니까?’
한 사업가는 이력서 뭉치를 들고 왔다. ‘누굴 뽑아야 사업이 잘되겠습니까?’ 그때 붙은 호칭이 ‘벤처 관상가’다. 입소문이 나면서 언론도 조명했다. 중앙일보 2002년 2월 25일 자 기사에선 김민정 관상가를 가리켜 ‘신세대 역술인’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면서 ‘테헤란로에선 첨단 산업과 관계가 없는 이방인으로 여겨졌던 역술이 벤처로 자리 잡고 있다’고 썼다.
벤처 붐이 사그라져도 기업인들과의 인연은 계속됐다. 이제는 인사로 골머리를 앓는 손님이 많았다. 철학관 문지방을 넘고 들어와 책상에다 이력서를 펼쳐놓고는, ‘이 친구 인재이긴 한데 요직에 앉혀도 될까요’ 물었다. 계파 전쟁의 전략 회의도 철학관에서 펼쳐졌다. ‘여기서 누굴 공략해서 날려야 되겠습니까?’, ‘명색은 같은 편이라는데 영 믿음이 안 가는 애들이 있어서. 이 중 누굴 조심해야 합니까?’
대형 프로젝트에 대한 인사 문의도 많았다. 임원이 기술을 유출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보니 누굴 믿어야 할지 몰라서다. 아예 기업 회장이 임원진 대상의 강의를 의뢰하는 경우도 있었다. 관리직의 입장에선 일만 잘하는 게 능사가 아니다. 인성과 궁합도 중요하다.
“대기업이 유독 사람을 잘 보려는 욕심이 크다. 인사가 만사라고, 잘못 배치했다간 회사의 운명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연예계라고 관상에 관심이 없을까. 높으면 높았지 절대 뒤처지지 않았다. 연예계 종사자들도 철학관의 문턱을 수시로 넘나들었다. 기획사 대표, 매니저, 아이돌그룹, 가수, 연예인 가릴 것 없었다.
그들의 공통된 주문은 ‘이미지 메이킹’이었다. 관상에 맞는 화장법, 패션 스타일, 말투까지 조언을 구했다. 이미 방송 출연도 함께 한 최양락·팽현숙 부부는 지금도 단골이다. 최양락 씨가 돈을 벌고 팽현숙 씨가 재테크로 재산을 불린 건 유명하다. 그 재산을다시 최양락 씨가 사업을 하다 몇 번 실패한 탓에 주눅이 들 법도 하지만, 부부는 방송에 나와 코미디스럽게 자신들의 상황을 풀어내 더 인기를 끌었다. 이런 방향성에도 김민정 관상가의 조언이 뒷받침됐다.
엔터 업계에서의 소문은 바다를 건넜다. 1990년대 중반 한 지인의 초대로 일본 도쿄에 간 일이 있었다.
“요코하마에서 선생님을 찾습니다.” 지인이 채근했다. 가보니 요릿집 별실 앞에 검은 세단이 줄지어 있었다. 그 안에는 요코하마를 근거지로 한 조직폭력 두목이 앉아 있었다. 기름칠한 머리, 스리피스 정장, 에나멜 구두, 얼굴이 비칠 듯한 백금 벨트. 누가봐도 ‘나 건달이오’ 하는 차림새였다.
그런데 말투는 사근사근했다. ‘한국에서 왜 그러고 계십니까. 일본에 오시면 스타로 만들어줄게요.’
![6월 8일 삼정호텔에서 개최된 사단법인 한국역학사협회 및 한국역리학회 대의원 총회. 김민정(왼쪽 둘째) 관상가도수석부이사장으로 참석했다. [사진 김민정 관상가]](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506/22/25d2a0e8-49d7-4b1b-854d-20ed9d15b156.jpg)
6월 8일 삼정호텔에서 개최된 사단법인 한국역학사협회 및 한국역리학회 대의원 총회. 김민정(왼쪽 둘째) 관상가도수석부이사장으로 참석했다. [사진 김민정 관상가]
대통령 중 최규하 관상이 훌륭
“고민 없이 거절했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신문사 인터뷰가 잡혔다. 그걸 계기로 방송 출연까지 이어졌다. 모두 흐름이었다.”
그렇다면 관상은 바꿀 수 있는 것일까. 정확하게 말하면 시운(時運)을 불러올 수 있을까. 살다 보면 앞이 보이지 않고 물길마저 끊기는 경우가 있지 않던가. 내게 시운은 언제 오나 하고 첩첩산중의 삶을 견디는 것도 한계가 있다.
김민정 관상가는 답한다. “운명을 바꿀 수 없다면 관상을 볼 이유가 없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는 따로 있다고들 한다.관상학계에서도 그걸 부인하지는 않는다. 천운을 타고난 사람이 있으면 그 반대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기회가 왔을 때 그걸 잡느냐, 마느냐는 개인에게 달렸다. 천운도, 불운도 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관상에는 희망이 존재해야 한다. 관상보다 언상보다 수상보다 중요한 게 심상이다.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수히 많은 기회도 접하지만 유혹도 받는다. 그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 그 갈림길에 서는 건 얼굴이 아니라 마음이다.”
재물운도 마찬가지다. 관상에서 재물운을 결정하는 것은 눈썹과 눈 사이의 전택궁이다. 재물이 빠져나가지 않게 콱 틀어막는 곳은 코다. 하지만 수백억, 수천억원을 벌어도 거지 신세를 면치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적게 벌어도 꾸준히 모아 부자가 된 사람도 있다. 돈복이 왔을 때의 심상이 그만큼 중요하다.
“요즘엔 물질 만능과 외모지상주의가 심화해서 젊은 사람에겐 와 닿지 않는 얘기다. 하지만 진실한 길을 묵묵히 가면 좀 느려도 반드시 좋은 날은 온다.”
겸손한 태도는 기본이다. 성공을 거뒀다고 남들을 업신여기고 비아냥거리고 으스대는 사람에겐 10년짜리 운이 1년으로 단축된다. 본인이 번 것 이상으로 남들에게 베풀면 1년짜리 운이 10년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좋은 관상은 누구였을까. 정치와 관상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궁금해져서 물으니 의외의 답이 돌아온다.
“최규하 전 대통령이다.”
왜인고 하니 추락하지 않고 무탈하게 사는 관상이라고 한다. 거기다 인품과 덕도 갖췄다. 정치인으로선 결단력이 약하고 답답한 성품일 수 있다. 하지만 한 개인의 관상으로선 그만한 게 없다는 것이다.
“권력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길어봐야 10~20년이다. 평안하고 별일 없고 집안이 화목한 게 좋은 거다.”

김민정 관상가는 관상의 해외 시장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 이른바 K-컨설턴트다. 김정훈 기자
관상가는 매사에 입조심해야
요즘 유튜브에는 관상가를 흉낸 낸 영상이 넘쳐난다. ‘이런 눈이면 이중인격이다’, ‘이런 입매는 바람기가 있다’ 단편적인 해석이 무분별하게 소비된다. 그러다 보니 특정 이목구비를 지닌 이들이 부당하게 낙인 찍힌다.
“뱀눈이라고 해서 다 교활한 건 아니다. 오히려 그런 눈에 곧은 콧날과 단정한 입매를 가지면 계산도 빠르고 위기에서 곧잘 빠져나오는 지혜가 있다.” 이목구비의 조화가 단연 중요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조화를 깨뜨린다.
성형외과도 문제다. 이제는 코디네이터가 상담하며 관상을 거론한다. 이래야 복이 트인다, 저래야 유명해진다는 식이다. 죄다 인터넷이나 유튜브에서 주워들은 수준이다. 심지어는 손금 성형까지 권유한다. 절대 손대면 안 되는 손금을 억지로 찢었다가 화를 입은 사례도 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 꼴이다.
김민정 관상가가 유튜브에 진출한 것도 이런 세태와 무관치 않다. 이런 코가 잘못됐다, 귀가 잘못됐다, 인생이 안 풀리는 건 생김새 때문이라는 식의 확증편향에 반감을 느껴서다. 말하기 좋아하는 얼치기들 때문에 관상학이 무너지고 있다. 그래서 영상은 밋밋하고 심심해도 조용하게 알려줘야 할 것을 전하고 있다.
“관상가의 혀에는 칼이 달려 있다. 말 한마디로 희망을 줄 수도, 절망을 줄 수도 있다. 그래서 항상 조심한다. 경력이 깊어질수록 혀도 무거워진다.”
자신의 공부를 위한 면도 있다. 스승에게선 신문을 통해 세상을 공부했다. 정치, 사회, 문화, 경제, 예술 등 모든 걸 알려고 했다. 하지만 이제 신문만으로는 부족하다.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유튜브는 일상을 파고들었다. 그래서 유튜브의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가 돼봤다.
비단 그뿐일까. 인스타그램, 틱톡에서도 활동한다. 그러다 보니 목표도 생겼다.
“해외에도 한국의 관상을 알리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이른바 K-컨설턴트다. 우리의 역사와 한복을 접목한 관상이라면 충분히 통하지 않을까.”
안덕관 월간중앙 기자 ahn.deokkwa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