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북아일랜드 관세동맹에 잔류" 비수 내밀자 난리난 영국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가 브렉시트 이후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국경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방안을 밝혀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됐다. [EPA=연합뉴스]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가 브렉시트 이후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국경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방안을 밝혀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됐다. [EPA=연합뉴스]

 영국과 유럽연합(EU) 사이에 진행되던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협상에 지뢰가 터졌다. 브렉시트 이후 영국과 EU 소속인 아일랜드의 국경을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는 원래부터 골칫거리였는데, 협상이 본격화하자 충돌 소재로 불거졌다.

 영국 정부를 향해 EU 측은 북아일랜드를 아일랜드와 묶어 EU의 관세동맹 안에 두자는 비수를 꺼냈다. 역사적으로 시한폭탄 같은 북아일랜드 문제를 EU 측이 제기하자 영국 정부는 지불하기로 약속한 ‘이혼 합의금'을 내지 않겠다고 맞받아치는 등 갈등이 격화하고 있다. 

미셸 바르니에 유럽 브렉시트 수석대표가 입장을 밝히고 있다. [EPA=연합뉴스]

미셸 바르니에 유럽 브렉시트 수석대표가 입장을 밝히고 있다. [EPA=연합뉴스]

 EU는 지난달 28일(현지시간) 브렉시트 조약 법률문서 초안에서 영국이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간에 세관 등을 설치하는 ‘하드 보더(hard border)’를 피할 수 있는 더 좋은 방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브렉시트 이후 북아일랜드를 EU의 관세동맹에 남기자고 제시했다. 영국이 관세동맹에서 탈퇴할 경우 현재 '유나이티드 킹덤'으로 묶여 있는 북아일랜드가 사실상 EU와 영국의 국경이 되다시피 하는 방안이다.

 현재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는 사람과 물자가 자유롭게 이동하고 있다. 500㎞에 달하는 양측의 접경지대에는 검문소 등도 없고, 연결된 통로만 300곳 이상이다. 하루 평균 4만명 가까이 국경을 넘나든다. 아일랜드 맥주 기네스가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상품 포장을 하는 등 제품 가공 등도 국경 없이 이뤄지고 있다. 

트럭이 아무런 장애물 없이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국경을 지나는 가운데 브렉시트 반대 표지판이 붙어 있다. [AP=연합뉴스]

트럭이 아무런 장애물 없이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국경을 지나는 가운데 브렉시트 반대 표지판이 붙어 있다. [AP=연합뉴스]

 특히 북아일랜드 문제는 1998년 벨파스트 협정을 통해 평화체제를 유지해오고 있어 영국에 민감한 사안이다. 1차 세계대전 후 영국은 북아일랜드는 남기고 아일랜드를 독립시켰다. 그러나 북아일랜드에서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는 구교 세력과 잔류를 바라는 신교세력의 투쟁이 달아올랐다. 이들의 충돌로 수천 명이 숨지고 테러가 빈번하다가 장기간 협상 끝에 벨파스트 협정이 맺어졌다.


 이를 고려해 테리사 메이 총리는 아일랜드와의 국경을 개방하겠다는 입장이지만, 브렉시트로 EU 단일시장과 관세동맹에서 떠날 경우 어떻게 세관이나 국경 분리대를 설치하지 않을 수 있는지가 숙제로 남았다. 영국은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사이에 '기술적인 장치'를 설치하면 국경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입장이지만 어떻게 구현이 가능한지는 밝히지 않았다.

브렉시트 반대 시위자들은 의사당 밖에서 EU 깃발과 영국 국기가 합쳐진 깃발을 들었다. [EPA=연합뉴스]

브렉시트 반대 시위자들은 의사당 밖에서 EU 깃발과 영국 국기가 합쳐진 깃발을 들었다. [EPA=연합뉴스]

 어정쩡한 상황에서 EU 측이 구체적인 브렉시트 방안을 밝히자 디테일 속에 숨어 있던 악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당사자 중 하나인 아일랜드의 레오 바라드카르 총리는 라디오 인터뷰에서 “브렉시트에 찬성하는 영국 정치인이나 북아일랜드 정당은 ‘안돼’라고만 할 게 아니라 대안 A나 B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라”며 EU 측 제안을 환영했다.

 하지만 메이 총리는 같은 날 의회에서 “EU 법률문서 초안의 내용이 실행된다면 아일랜드 해를 사이에 두고 관세와 규제 국경을 만드는 것"이라며 “영국의 공동 시장을 약하게 하고 헌법적 통합성을 위협할 수 있어 어떤 영국 총리도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데이비드 데이비스 영국 브렉시트 담당 장관도 1일 보수당 하원의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국이 제기한 이슈가 처리되지 않으면 EU에 이혼합의금 조로 지불하기로 했던 EU 분담금을 지급하지 않겠다고 밝혔다고 더타임스가 전했다. 400억~450억 유로(약 52조~60조원)로 추정되는 금액을 지렛대로 EU 측을 역으로 압박한 것이다.

제러미 코빈 노동당 대표가 브렉시트 관련 입장을 밝히고 있다. [EPA=연합뉴스]

제러미 코빈 노동당 대표가 브렉시트 관련 입장을 밝히고 있다. [EPA=연합뉴스]

 북아일랜드 문제로까지 번진 관세동맹 탈퇴 문제는 야당과 메이정부 간 갈등 요인으로도 떠올랐다.

  
 제러미 코빈 노동당 대표는 코벤트리대학 회견에서 “노동당은 유럽과의 교역에서 관세를 없애고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간 하드 보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EU와 새로운 형태의 관세동맹을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리엄 폭스 국제통상부 장관은 “관세동맹 잔류는 비 EU 국가들과 무역협정을 맺으려는 영국의 기회를 제한할 뿐 아니라 영국이 EU의 무역 규정을 지켜야 하는 불리한 상황을 초래한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보수당 원로인 존 메이저 전 영국 총리조차 메이 총리를 향해 보수당 내 극단적인 브렉시트 지지자들과 맞서고, 단일시장과 관세동맹 잔류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원칙을 철회하라고 요청했다. 메이저 전 총리는 런던에서 한 연설에서 “많은 유권자가 잘못 인도됐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고, 그들의 결정을 재고할 충분한 권리가 있다"며 브렉시트 관련 제2 국민투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도날트 투스크 EU 정상회의 상임의장과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가 총리 관저에서 만나 브렉시트 관련 논의를 했으나 입장차만 확인했다. [EPA=연합뉴스]

도날트 투스크 EU 정상회의 상임의장과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가 총리 관저에서 만나 브렉시트 관련 논의를 했으나 입장차만 확인했다. [EPA=연합뉴스]

 메이 총리와 도날트 투스크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1일 영국 총리 공관에서 만나 북아일랜드 문제 등을 협의했으나 입장차만 확인했다. 투스크 의장은 “북아일랜드 관련 EU 측 제안보다 더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내보라"고 요구했다. 메이 총리는 2일 브렉시트 이후 영국과 EU의 관계에 대해 발표할 예정인데, 만회할 내용이 담길 것인지 주목된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sunty@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