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아들에게 아빠가 해준 조언은 단 한마디. “왼손으로 쳐라.”
![1995년 한·일 수퍼게임에서 만난 이종범(왼쪽)과 스즈키 이치로. 둘은 94년 나란히 타율 4할에 도전했을 만큼 야구천재로 통했다. [중앙포토]](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809/11/8d585fe7-ee17-4b7e-bda6-bb37cada5f18.jpg)
1995년 한·일 수퍼게임에서 만난 이종범(왼쪽)과 스즈키 이치로. 둘은 94년 나란히 타율 4할에 도전했을 만큼 야구천재로 통했다. [중앙포토]
한국 최고의 타자였던 아빠는 아들을 가르치지 않았다. 자신을 닮았지만 똑같진 않기 때문이다. 10일 현재 타격 1위(0.363) 이정후(20·넥센)가 아버지 이종범을 닮은 듯 닮지 않은 이유다.
이종열 해설위원(대표팀 전력분석팀장)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부족한 점이 눈에 보였을 텐데 모르는 척하기 아주 어려웠을 것”이라며 “아무리 부자지간이라고 해도 키와 팔 길이, 근력 등이 다르다. 아들이 자신에게 맞는 타격을 스스로 찾도록 했다. 그게 이정후가 잘 성장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선수 시절 이종범은 번개처럼 빠른 배트 스피드로 공을 내리쳤다. 장타자가 아님에도 승부의 흐름을 바꾸는 거칠고도 뜨거운 플레이를 했다. 이정후는 반대에 가깝다. 투구를 잘 보는 눈, 폭발적인 속근(速筋), 악바리 같은 근성은 아버지를 빼닮았지만 다른 점이 더 많다.

이정후
이종열 위원은 “구종과 코스에 관계없이 이정후는 잘 친다. 투구 궤적에 맞춘 스윙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스윙에 군더더기가 없다. 쉽게 치는 것처럼 보이는 게 진짜 실력”이라고 말했다. 이정후는 몸쪽 공을 때린 뒤 오른발목이 확 꺾일 만큼 강한 회전력을 만든다. 이 또한 일부러 만든 자세가 아니라 투구궤적을 따라 자연스럽게 스윙한 결과다.
발 빠른 타자는 내야안타를 많이 만들기 위해 다운스윙이나 레벨 스윙을 하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이정후는 무릎 아래를 파고드는 낮은 공도 골프 스윙으로 들어 올린다. 휘문고 시절 “(장타자도 아닌데) 너무 올려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들었지만, 이정후는 기존의 이론을 따르지 않았다. 공을 정확하고 강하게 때리는 것에만 집중한 끝에 지금의 스윙을 만들었다.
이정후의 스윙은 일본과 미국에서 통산 4367안타를 때린 스즈키 이치로(45·일본)의 타법을 닮았다. 이종열 위원은 “이치로의 스윙도 투구 궤적에 가깝다. 스트라이크존에 오는 공이라면 적극적으로 때리는 성향도 비슷하다”고 했다. 하루에 안타 2개 쳤다고 만족하는 게 아니라 기어이 세 번째, 네 번째 안타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점도 이치로와 닮았다. 감정 표현이 거의 없고 항상 냉정함을 유지하는 태도도 그렇다. 어릴 때부터 ‘이종범의 아들’로 유명했던 이정후는 “아빠한테 미안하지만 내 롤모델은 이치로”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종범은 대학 졸업 후 프로에 입단했고, 방위로 군 복무도 했다. 1990년대 한국 야구는 메이저리그는 물론 일본과의 격차도 컸다. 일본에 진출한 최초의 프로야구 타자가 이종범이었다. 아들은 아버지를 뛰어넘을 수 있는 여건을 갖췄다. 이치로처럼 우투좌타이며, 이치로처럼 고교 졸업 후 프로에 직행했다. 또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야구 금메달의 주역으로서 병역특례 혜택도 받았다. 이치로처럼 20년 이상 활약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든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재능을 물려줬지만, 아들의 코치가 되진 않았다. 잔소리를 하는 대신 큰 그림을 함께 그렸다. 이정후가 이치로를 닮아간다면 가장 좋아할 사람은 이종범이다. 자기 이름이 아닌 ‘이정후의 아버지’로 불릴 때 가장 좋아할 사람 역시 이종범이다.
김식 야구팀장 see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