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0일 처음 통화한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왼쪽)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AP=연합뉴스·뉴스1]
미국과 패권 갈등을 빚고 있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왼쪽)과 장기 집권 중에 우크라이나를 침략해 유럽을 넘어 세계 안보 질서에 파란을 일으킨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중앙포토]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제20대 대통령선거는 이제 역사의 한 페이지 속으로 넘어갔다. 막판에 극적인 '단일화 동남풍'이 불면서 윤석열 후보가 '신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승리했고, 이재명 후보는 '신 초한지(楚漢志)' 드라마를 끝내 쓰지 못했다. 계가(計家) 바둑 같은 0.73%포인트 차이였지만, 선거는 단 한 표만 이겨도 승부가 갈리는 법이다. 도도한 민심 앞에서 말로는 승복하고 실제론 은근슬쩍 불복하는 양봉음위(陽奉陰違) 행태를 보이면 누구든 거센 역풍에 쓸려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5년 만의 신·구 권력 교체기를 맞아 나라 안에서는 당분간 대선 후유증으로 티격태격하겠지만, 급박하게 돌아가는 나라 밖을 동시에 잘 살펴야 한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다툼 와중에 우크라이나 전쟁을 도발한 러시아까지 가세하면서 국제정치의 체스판이 요동치고 있다. '지정학적 지진'이 다가오는데 집안싸움만 할 수는 없지 않겠나.
새 정부는 외교 분야에서 세 가지를 꼭 염두에 두면 좋겠다. 첫째, 당선인 특사는 4강(미·중·일·러) 파견 관행에서 탈피해 필요성을 신중히 검토한 뒤 꼭 필요한 나라에만 보내자. 노무현 정부 때 시작한 당선인의 특사 파견 외교는 자칫 득보다 실이 많을 수도 있다. 예컨대 문재인 대통령은 당선 직후인 2017년 5월 19일 이해찬 전 총리를 중국에 특사로 보냈는데, 시진핑 국가주석에게 보고하는 낮은 자리에 특사를 앉혀 톡톡히 망신당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새 정부의 대외 전략을 충분히 가다듬고 숙성시킨 다음에 국익 극대화에 맞는지를 면밀히 따져보고 추진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2017년 5월 19일 문재인 대통령의 특사로 방중한 이해찬(오른쪽 둘째) 전 총리가 시진핑(오른쪽 첫째) 중국 국가주석과 면담하고 있다. 특사를 낮은 자리에 앉혀 의전 홀대라는 비판이 제기됐다.[사진공동취재단]
둘째, 외교 의전(Protocol)을 존중해 국격을 스스로 높이자. 취임 전이라도 주요국 정상들과의 소통은 필요하다. 실제로 윤 당선인은 당선 수락 5시간 만인 지난 10일 오전 10시쯤 미국 측 요청으로 조 바이든 대통령과 직접 통화했다.
그런데 하루 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친서를 전하겠다는 싱하이밍 주한 중국 대사를 윤 당선인이 면담한 장면을 놓고 외교가에서 입방아에 올랐다. 주요국 대사를 역임한 전직 고위 외교관은 "친서라지만 내용을 보면 그냥 축전이던데, 직접 만나지 말고 비서가 축전을 접수해 전달했으면 될 일이었다. 친서를 들고 사진까지 찍어 공개한 것은 과공비례(過恭非禮)"라고 지적했다. 그는 "일국의 대통령 당선인이 특정 주재국 대사를 너무 쉽게 만나준 것처럼 오해를 살 수도 있다"고 전했다.
그날 오후 윤 당선인이 크리스토퍼 델 코소 주한 미국 대사대리(공사참사관)를 만난 것도 외교 의전상 격이 맞지 않는다는 뒷말이 나왔다. 주한 미국 대사는 지난해 1월 이후 14개월째 공석이다. 대사 출신 한 외교관은 "상호주의를 따라야 하는 외교 무대에서 대한민국 국격은 우리 스스로 높여야 한다"고 쓴소리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오른쪽)이 5월 11일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 당선인 사무실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축전을 들고온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를 만나 함께 포즈를 취했다. [국회사진기자단]
셋째, 대선 논공행상에서 밀린 정치인을 주요국 대사로 임명하는 관행을 끊자. 특정 국가와의 외교를 강화한다는 이유로 전직 총리·부총리·장관급이나 대통령 측근을 대사로 내보내도 기대만큼 실리를 못 챙기고 국격만 낮출 수 있다는 것이 외교가의 우려다. 어차피 고위직 출신이 가더라도 상대국 장관 만나기조차 하늘의 별 따기다.
역대 주중대사 자리가 특히 뒤탈이 많았다. 과거 직업 외교관들은 실력과 성과를 호평받았지만, 노영민·장하성 등 정치적으로 임명된 대사들은 적잖게 잡음을 일으켰다. 노영민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2017년 12월 주중 대사로 파견된 뒤 시진핑 주석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면서 인민대회당 방명록에 '만절필동(萬折必東)'이란 글귀를 남겨 사대주의란 비판을 받았다. 조선 시대 소중화(小中華)주의자들이 충신을 자처하고 명나라 황제를 흠모하며 즐겨 쓴 글귀였다. 상전 대하듯 저자세로 중국을 받들었지만 결국 돌아온 것은 대통령 부부의 '혼밥 홀대'라는 외교 참사 아니었나.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2017년 12월 14일 중국 베이징의 한 음식점에서 노영민 당시 주중대사 부부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있다. 국빈 방문 중에 '혼밥 홀대'란 논란이 있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지난 5년간 외교는 국격도 국익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는 혹평을 들었다. 외교관의 휴대전화를 사찰하고 정치 이념으로 전문가 집단의 편을 갈랐다. 청와대가 독주하니 외교부는 소외됐다. 시대에 뒤떨어진 '86 정치 세력'의 이념 편향에 염증을 느껴 일할 맛을 잃었다는 외교관들의 자조가 흘러나왔다.
5월 10일 출범하는 윤석열 정부는 부문별로 최고의 외교 전문가를 발탁해야 한다. 흐트러진 대외 진용을 시급히 정상화해야 한다. 외교관들이 오후 6시에 칼퇴근하며 '워라밸'을 즐길 때인가. 다시 일하는 분위기로 다잡아야 한다. 국익의 최전선인 외교 현장에 핏기가 돌고 역동성을 회복해야 한다.
2017년 12월 5일 당시 노영민 주중대사가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문재인 대통령의 신임장을 제정하면서 방명록에 만절필동(萬折必東)이라 적어 사대주의 논란을 빚었다.[주중대사관]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