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만 번 촘촘한 붓질, 땅을 다지듯 일군 그리움의 세상

지난달 26일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9억원에 낙찰된 이성자 작품. [사진 크리스티코리아]

지난달 26일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9억원에 낙찰된 이성자 작품. [사진 크리스티코리아]

프랑스에서 활동한 한국 추상화가 고(故) 이성자(1918~2009) 화백의 작품가가 치솟고 있다. 지난달 26일 열린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이 화백의 1961년 작 ‘Subitement la loi’(갑작스러운 규칙)가 9억원에 낙찰됐다. 작가의 경매 최고가 기록이다. 이전 최고가 작품은 지난해 12월 크리스티 홍콩에서 낙찰된 1963년 작 ‘Le vent en temoigne’(바람이 증언한다)였다. 또 국내에선 지난 3월 케이옥션 경매에서 5억원에 낙찰된  1963년작 ‘샘물의 신비’가 최고가 거래 작품이었다.

최근 미술시장이 호조인 데다, 한국 작가가 상승세를 타고 있는 분위기가 한몫했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지난달 26~27일 열린 크리스티 홍콩 경매 매출은 총 2902억원(수수료 포함)으로 역대 두 번째였다. 낙찰률이 97%였다. 심문섭, 우국원 등 한국 작가 경매 최고가 기록도 속출했다.

방탄소년단 RM이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린 이성자 작품. [사진 RM 인스타 이미지]

방탄소년단 RM이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린 이성자 작품. [사진 RM 인스타 이미지]

특히 이성자가 눈길을 끄는 건 그가 태어난 지 100년이 넘었고, 10여 년 전 세상을 떠난 작가라서다. 그간 국내 미술계에선 이성자 작품이 상대적으로 조명받지 못했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중국·대만 컬렉터 중 이성자 작품을 수집하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번 경매에서 중국 추상미술의 개척자 자오 우키(1921~2013) 작품이 445억원에 낙찰됐는데, 자오는 프랑스에서 이성자와 교류했던 작가다.

열성적인 미술수집가로 알려진 BTS(방탄소년단) 리더 RM이 지난달 1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지난해 12월 낙찰된 이성자 작품 사진을 올려 관심을 모았다. 일각에선 이미 팔린 작품의 사진을 RM이 클로즈업 샷 등 여러 장 올리면서 RM이 낙찰자일 가능성도 제기됐다. RM은 근현대 작가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여왔다.

이성자

이성자

경남 진주 출신인 이성자는 일본에 유학한 뒤 의사인 남편과 결혼했다. 이혼 후 1951년 홀로 프랑스로 떠났다. 그랑 드 쇼미에르 아카데미에서 회화를 배웠고, 한국 화가로는 처음 라라뱅시, 샤르팡티에 등 유명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의 작품은 음과 양, 질서와 자유, 부드러움과 견고함, 동양과 서양 등 상반된 개념이 공존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운율감을 이루는 선(線)의 반복에 여러 겹 쌓아 올린 색 배합으로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했다.


30대의 초기작부터 89세에 작업한 마지막 작품까지 시기별 변화도 뚜렷한데, 특히 1960년대가 전성기로 꼽힌다.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근대미술팀장)은 “이 시기에 탄생한 대표작 ‘내가 아는 어머니’는 수만 번의 촘촘한 붓질로 땅을 다지고, 베틀로 천을 짠 것처럼 높은 밀도를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전성기 작품은 프랑스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성자는 후기에 원, 음과 양, 은하수 등을 모티브로 새로운 작업을 이어갔다. 그리고 2009년 작업실이 있는 프랑스 남부 투레트에서 생을 마쳤다. 눈을 감기 전 고향 진주시에 작품 367점을 기증했고, 시는 2015년 진주시립이성자미술관을 개관했다. 지난 3일 이곳에서 ‘이성자 화백 탄생 104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