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일리야는 지난 10일 서울현충원을 찾아 최재형 선생의 묘를 복원해달라는 서명운동을 했다. 사진 최재형기념사업회
추석날인 지난 10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노란색 어깨띠를 두른 러시아 청년이 손에 든 피켓에 적힌 문구를 외치고 있었다. 이국 청년의 서툰 한국어에 추모객들이 하나둘 모여들자 그는 A4용지 4장 분량의 문서를 하나씩 건넸다. 문서엔 그가 현충원에서 서명운동하게 된 이유가 적혔다. 설명을 들은 추모객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에 서명하자 그는 “감사합니다”라며 웃어 보였다. 이날 최재형기념사업회(이사장 문영숙)와 함께 서명운동을 벌인 그는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1860~1920)의 5대손인 대학생 최일리야(20)다.
최일리야의 특별한 서명운동엔 102년 전 세상을 뜬 현조부(玄祖父)의 기구한 사연이 숨어있다.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로 불리는 최재형 선생은 1920년 4월 일제에 피격돼 세상을 떠났다. 광복 후 정부가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1970년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다. 서거 당시 일본군이 유해를 감추는 바람에 가묘(假墓)로 건립됐다고 한다. 당시 원호처(국가보훈처)는 최 선생의 손자를 자처한 최모씨의 요청에 따라 서울국립묘지관리소(국립서울현충원)에 최 선생의 묘소를 세웠다고 한다.
그러다 1990년 한국과 소련(러시아)이 수교를 맺으면서 감춰진 진실이 밝혀졌다. 최 선생의 유족이 처음 고국 땅을 밟으면서 진행된 유전자(DNA) 검사에서 그동안 최 선생의 유족연금을 받았던 최모씨가 가짜 후손이란 게 탄로 난 것이다. 최 선생의 막내딸 최 엘리자베타가 유족연금 수급자로 국가보훈처에 등록하고 이후 손자 최 발렌틴이 이어받으면서 논란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유족 통보 없이 사라진 묘소

최재형 선생의 손자 최 발렌틴이 2009년 재차 서울현충원 묘역을 참배하러 갔으나 가묘가 사라져 망연자실한 모습. 지금도 이 자리는 빈터로 남아 있다. 사진 최재형기념사업회
‘가묘 멸실 사건’은 지난해 최재형기념사업회가 최 선생의 가묘를 부부합장묘로 복원하는 작업을 추진하면서 다시 수면위로 떠올랐다. 과거 최 선생의 묘지가 있던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108호가 빈터로 남아있으니 그 자리에 최 선생과 부인 최 엘레나의 부부합장묘를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최재형기념사업회는 최 선생의 묘가 석연찮은 이유로 멸실된 만큼 복원할 이유가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키르기스스탄에 있는 최 엘레나의 유골을 국내로 봉환하기 위한 절차를 마친 상태다. 최 선생의 유해가 아직 발견되지 않은 터라 부부합장묘엔 러시아 우수리스크에 있는 최 선생의 옛집 마당의 흙과 유품을 묻을 계획이다.

지난 5월 최재형기념사업회가 유족의 뜻을 담아 윤석열 대통령에게 공문을 보냈다.사진 문영숙 이사장
그러나 이후 추가 조치가 없었고 이 사안을 널리 알리기 위해 현충원 서명운동을 진행했다는 게 최재형 기념사업회의 설명이다. 최재형기념사업회는 국방부에 최 선생의 허묘가 멸실된 경위를 파악해달라는 내용의 정보공개청구를 한 상태다. 문영숙 최재형기념사업회 이사장은 “후손이 가짜였다고 해도 최재형 선생의 가묘를 없앤 게 말이 되느냐”며“국가보훈처와 국방부는 과거의 시행착오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