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번의 재판, 잊혀진 정의②
사법부는 중증 동맥경화를 앓고 있다. 재판 지연에 분통을 터뜨리는 당사자들의 모습은 법원의 익숙한 풍경이다. 특히 1심 마비 증세는 심각한 수준이다. 2017년 사법농단 의혹이 제기된 이후 이어진 대법원장 구속과 판사 14명 기소라는 초유의 사태를 딛고 등장한 김명수 코트가 대법원장에 집중된 행정권력을 해체하면서 빚어진 일이다. 인사상 '당근과 채찍'을 포기하자 법관사회에 들어선 수평적 문화는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의 박탈과 동전의 양면을 이뤘다. 그 사이 ‘무엇이 사법농단인가’를 가리기 위한 양승태 전 대법원장 1심 재판은 4년 넘는 기간 동안 280차례(13일 기준) 열렸다. 평가의 부재 속에 시행착오가 누적되면서 사법부는 표류 중이다. 3개월 뒤 대법원장이 바뀐다.

'사법농단' 사태 이후 직권남용 등 혐의로 기소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7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속행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뉴스1
“이 재판이 시작될 때만 해도 ‘세기의 재판’이 될 거란 평가가 있었다. 실체진실·소송경제·적법절차 원칙이 아주 조화롭게 조율돼 법학도에게도 본보기가 될 재판을 기대했는데 오히려 재판 과정에서 소송 지연을 초래하는 피고인들의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들이 있었다.”
지난 7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의 266번째 공판. “2018년 수사에 참여하고 다른 검찰청으로 전보된 지 4년 지나도록 진행 중”인 재판에 나온 호승진 부부장검사가 재판 지연의 책임을 양 전 대법원장 등에게 돌렸다.
지난 2019년 2월 검찰이 헌정 사상 최초로 전직 대법원장을 구속기소해 시작된 이 재판은 법조계에서 “기네스북 도전감”(부장판사 출신 변호사)이란 말을 듣고 있다. 이 재판은 지난 9일 한 차례 더 열려 공판기일만 267번을 채웠고 재판 쟁점을 정리하기 위한 공판준비기일을 포함하면 280번 열렸다. 형사합의부 사건 1심 평균 공판 횟수는 3.72번(2022 사법연감), 박근혜 전 대통령 1심도 116번에 그쳤다.
전·현직 판사 중 사법농단 의혹으로 검찰 조사를 받은 이들이 100명이 넘고, 증인석에 불려온 이들도 66명이다. 2017년 불거진 뒤 사법부 전체를 헤집어놨다는 평가를 받는 이 재판은 아직 끝을 맺지 못한 채 진행 중이다. 그 사이 법조계에선 “세기의 재판 지연”(부장검사 출신 변호사) “형사소송법 교과서 그 자체”(대형 로펌 변호사)라는 헛웃음이 나오는 일이 됐다. 형사소송법과 대법원 예규 등에 나오는 원칙과 절차가 모두 구현되는 이 재판은 '지연 전략' 선례가 돼 다른 재판에도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김영옥 기자
내가 아는 것이 사실인가…왜곡된 기억과의 사투
지난해 3월 증인으로 나온 강형주 전 법원행정처 차장은 “행정처 근무한 지 만 7년, 검찰 조사받은 지 3년 지나 기억이 많이 희미해졌다”고 말했다.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은 지난 2020년 5월 증인신문으로 나와, 1년 전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 재판에서 한 말에 대해서도 “그때 기억이 맞는지 지금 기억이 맞는지 장담하지 못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때 진술이 맞는지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기억력의 문제에선 등장 인물들의 연령도 무시 못 할 변수다. 피고인인 양 전 대법원장은 75세, 고영한 전 대법관은 68세, 박병대 전 대법관은 65세다. 기억 안 난다는 증인들의 얘기는 전부 증거에서 배제하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증인이 기억을 못해 검찰 피의자 신문조서 진술 신빙성을 법정에서 제대로 검증하지 못하는 상황이니, 조서 증거능력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지난달 31일, 양 전 대법원장 변호인)”는 거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왼쪽부터)과 고영한·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이 지난 2020년 3월 11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직권남용 혐의 등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트럭 기소’ 별명…“수사·기소 전반이 무리수”
“80명 넘는 검사가 8개월 수사 끝에 300페이지 넘는 공소장을 창작했다. 18만 쪽에 이른다는 수사 기록의 100분의 1도 보지 못했는데, 여러 사람의 진술 조서나 피의자신문조서가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 추측성 진술로 뒤덮여 있었다. 검사의 독촉에 못 이겨 유도신문에 영합한 진술이 대부분이다.” (양 전 대법원장, 2019년 5월 첫 공판에서)
재판에 나온 증인만 99명이다. 대부분 양 전 대법원장 기소 전 검찰에서 참고인 조사를 받았던 이들이지만, 양 전 대법원장 등이 이때 작성된 조서를 증거로 채택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아 결국 증인석에 서야 했다. 양 전 대법원장의 변호인은 지난 7일 공판에서 “공판준비 때부터 우리는 증인 수 줄이려고, 검찰 조서 중 재전문·의견 진술 제외해 주면 (증인으로 부르지 않고 조서를 증거로 쓰는 것에) 동의하겠다고 했는데 검찰이 거부했다. 이미 증언 마친 증인을 검사가 다시 신청해 소송이 지연된 바도 있고, 우리가 동의한 증거에 대해서도 검찰에서 조사가 필요하다고 해 17기일에 걸쳐 4개월 넘게 진행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호 검사의 피고인 책임론에 맞대응한 것이다.

차준홍 기자
증인으로 나온 전·현직 판사 중 일부도 검찰 탓에 힘을 실었다. “검찰에서 질문 하나 통과하는데 한 시간 정도 걸렸다. 조서에 진술 취지와 다르게 기재된 내용도 있다(조병구 전 법원행정처 공보관)” “검찰 조사 당시 회유하려는 말을 들었다. 논의하지 않은 것도 연결하려 해서 너무 놀랐고 억지라고 생각했다(정지영 전 윤리감사실 심의관)” 등이다. 재판 초기부터 방청한 양 전 대법원장의 연수원 동기(2기) 한부환 전 법무부 차관은 “검찰이 말도 안 되는 것까지 끌어모아 기소하니 재판이 길어진다”며 혀를 끌끌 찼다.
검찰 “이런 피고인을 봤나”
검찰은 누구보다 법을 잘 아는 피고인들이 아무도 감히 실현하려 들지 못했던 형사소송법상의 원칙들을 고집한 게 재판 지연의 주된 원인이라고 본다. 한 검찰 관계자는 “재판 초반에는 증거 속성을 일일이 들여다보며 하나하나 태클을 걸었다”고 말했다. 7일 호 검사도 “갱신과정도 소송지연의 목적으로 활용된 듯한 느낌”이라며 지난 2021년 4월의 이야기를 꺼냈다.
당시 법원 인사이동으로 재판부 판사들이 바뀌자, 피고인들은 그간 심리 내용을 확인하는 갱신 과정을 ‘법대로’ 할 것을 요구했다. 대부분의 재판에선 판사들이 공판 기록들을 판사실에서 보기로 하고 넘어가는 ‘간이 갱신’이 이뤄지지만 대법관 출신의 세 피고인은 모두 “증인신문 녹취서는 보조적인 것이고 원칙대로 증거 조사를 다시 하려면 원칙적으로 이전 증인신문 녹음파일을 법정에서 틀어야 한다” 했다. 이전 재판장인 박남천 부장판사는 다른 법원으로 떠났지만 그의 목소리는 6개월간 중앙지법에서 재방송됐다.
검찰은 이런 식의 재생 갱신에 “재판 지연 의도”가 있다 의심하지만, 양 전 대법원장의 변호인 이상원 변호사는 “형사소송법이 추구하는 직접주의 원칙을 그나마 덜 훼손시키기 위해 불가피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런 공판 갱신은 최근 다른 재판에서도 유행이다. 지난 2월 재판부가 교체된 대장동 재판에서도 2개월간 같은 방식으로 갱신절차를 밟았다. 이 변호사가 법원 전반에 좋은 선례가 됐다는 증거라는 취지에서 대장동 재판을 언급하자 호 검사는 “피고인과 증인(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모두 고위직을 지내신 분들인데 (현직에) 계실 땐 왜 그 직접주의 원칙을 구현하지 않으셨느냐”고 반문했다.
일각에선 전직 대법원장이라 가능한 요청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평범한 사건에선 재판 지연으로 인한 시간과 비용 때문에라도 요청하기 어렵다”며 “만약 요청해도 판사에게서 ‘법대로 하자는 거죠’라는 반응이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사법농단' 사태 이후 직권남용 등 혐의로 기소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달 31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속행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김현동 기자
의혹으로 이어진 지연…논란의 재판부 교체
'2~3년 주기 순환근무'는 관행이지만 박 부장판사의 전보는 여러 혐의가 양 전 대법원장과 겹치던 이민걸 전 기조실장과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 임종헌 전 차장 재판을 맡았던 형사36부 윤종섭 부장판사가 유임돼 6년간(2016년 2월~2022년 2월) 근무한 예외와 대비를 이뤘다. 사법농단 처리와 관련해 “연루자 단죄” 목소리를 냈다는 윤 부장판사가 연장 근무 기간에 이 전 기조실장과 이 전 상임위원의 일부 혐의에 대해 유죄를 선고하자 법원 안팎에선 “윤 부장판사 연임은 김명수 대법원장이 유죄를 원한다는 의미”라는 해석이 난무했다. 임 전 차장 재판은 두 차례 재판부 기피 신청과 기각 과정에서 늘어졌다. 재판 지연이 결국 법원 내 물밑 갈등으로 이어진 셈이다.
한 지법 부장판사는 “재판부를 꼭 판사 3명으로 꾸리란 법은 없다”며 “방대한 공소사실을 신속·충실하게 심리할 수 있도록 큰 재판부를 꾸리고, 인사이동을 최소화한 상태로 재판을 마무리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증인으로 출석했던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이제 피고인·증인·판사·검사 모두 기억과 이해관계가 뒤죽박죽돼 재판이 미궁에 빠진 느낌”이라고 말했다.
양승태·박병대·고영한 재판 열 토막

2019년 1월 23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 도착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헌정사상 최초’의 전직 대법원장 구속기소가 ‘헌정사상 최다’ 재판까지 예정한 것은 아니었다. 검찰은 2019년까지만 해도 “이런 식으로 하다간 2021년에나 선고가 가능하겠다” 했고 서울고등법원 판사들은 2021년 인사에서 ‘형사부에 가면 혹시 양 전 대법원장 사건을 맡게 될까’를 생각했다고 한다. 4년간 재판이 어떻게 진행돼 온 것일까.
1기: 마음 급한 재판 준비 (2019년 3월~5월)
2기: 의욕의 야간재판 (2019년 5월~8월)
3기: 장기전 준비 (2019년 8월~2019년 12월)

보석으로 석방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019년 7월 22일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재판부는 양 전 대법원장에 대해 주거 및 통신제한, 보증금 납입을 조건으로 직권보석을 결정했다. 뉴스1
4기: 코로나 속 본격 재판 돌입 (2020년 1월~7월)

신재민 기자
5기: 차례차례 증인신문 (2020년 7월~2021년 1월)
6기: 재판부 교체의 여파 (2021년 2월~10월)
7기: 증인신문 재개 (2021년 11월~2022년 5월)

차준홍 기자
8기: 다시, 또 (2022년 5월~2023년 2월)
9기: 결심인 듯 결심 아닌 (2023년 2월~5월)
10기: 키맨도 불렀다, 이제 끝나나 (2023년 6월~)

김영옥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