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자초한 몰락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6ㆍ25 전쟁이 발발하고 서울이 함락될 때까지 3일 동안 총참모장 채병덕을 위시한 국군 수뇌부가 보여주었던 행태는 비판받을 부분이 많다. 그중에서 후방에서 허겁지겁 올라온 병력을 아무런 전략적 고려도 없이 도착한 순서대로 의정부 축선 방어에 축차적으로 투입해 녹아내리게 만든 것은, 한마디로 경험이 일천한 신생 군대가 보여줄 수 있는 무능함의 극치였다.
이로 인해 전쟁 전에 10만 정도였던 국군 병력은 불과 일주일도 되지 않아 자력으로 전세를 반전시킬 방법이 없는 수준인 3만 선까지 몰락했다. 의정부 전투에 투입됐다가 해체된 부대는 제2, 5, 7사단이었다. 유일하게 수도경비사령부(현 수도기계화사단)가 살아남았으나, 한강 이남으로 후퇴 후 여러 부대의 패잔병을 긁어모아 간신히 제대를 유지 시킨 것에 불과했다. 한마디로 전략ㆍ전술ㆍ작전ㆍ철학이 부재하여 벌어진 참변이었다.
전쟁 발발 당시에 의정부 축선을 담당하던 제7사단은 직전에 있었던 부대 재배치로 인해 아직 1개 연대의 이동이 이루어지지 않았던데다 농번기를 돕기 위해 상당수의 병력마저 외출ㆍ외박 나간 상태였다. 더해서 기갑ㆍ포병 등의 전력은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열세였다. 따라서 북한군의 주공인 제3, 4사단과 제105전차여단의 집중 공격을 받고 와해한 것은 불가항력적인 측면이 크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문제는 서울 사수에 대한 육군본부의 무모한 집념이었다. 물론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이기에 정치ㆍ경제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그러나 피아의 전력 격차가 현저해서 도저히 사수해 낼 상황이 아니라면 전략적으로 포기하는 대안도 고려해야 한다. 서울을 빼앗겨도 당장 전쟁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기에 한강 같은 지형지물을 이용해 방어선을 구축한 후 다음을 도모하는 것이 결코 잘못된 선택이 아니다.
1951년 1ㆍ4 후퇴 당시에 유엔군이 시민들을 소개하고 나서 서울을 적에게 다시 내어줬던 것과 두 달 뒤에 중공군이 별다른 교전 없이 서울에서 순순히 물러나 38선 일대로 후퇴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문제는 당시에 능력이 없으면서 위정자들과 군부는 허세를 부렸고, 오히려 거짓 정보로 시민을 혼란하게 만들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서울을 지켜낸 것도 아니었다.
통신 두절이 불러온 나비 효과
그런데 이렇게 의정부 축선에서 한심한 장면이 벌어지던 바로 그때 동부전선을 담당하던 제6사단은 북한군 제2군단의 공세를 저지해 개전 초 북한의 전쟁 전략을 와해했다. 이른바 춘천대첩인데, 역설적이지만 이런 찬란한 승리를 거두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육군본부와의 연락 두절이다. 전쟁 발발 직후에 제6사단은 육군본부와 통신이 끊겨 지시를 받지 못하고 단독으로 작전을 벌였다.
타 전선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한 상태였는데, 국군이 해주로 진입했다는 라디오 방송을 그대로 믿고 준비를 늦게 하는 바람에 모진교 폭파에 실패했을 정도였다. 그렇게 눈을 감고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였음에도 김종오 사단장은 전쟁 전에 수립된 계획대로 침착하게 작전을 펼쳤다. 그는 사단 예비대로 원주에 주둔하고 있던 제19연대에게 춘천으로 이동해서 홍천 북방에서 악전고투 중인 제2연대를 도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제19연대는 우선 선도대대를 징발한 차량 등을 이용하여 홍천으로 급거 보냈고 본대는 열차 편으로 서울을 거쳐 춘천으로 이동에 들어갔다. 이러한 침착한 대응으로 전개를 마친 제19연대는 이후 말고개 전투에서 북한군 제12사단을 격파하는 대승을 이끌면서 춘천대첩의 대미를 장식했다. 그런데 6월 27일 오전까지 제6사단은 육군본부와 통신이 개방된 상태가 아니어서 오로지 사단의 의지대로 작전을 펼쳤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는 결과적으로 6ㆍ25 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당시 육군본부는 처음 언급처럼 후방에서 올라온 부대들을 앞뒤 가리지 않고 축차 투입하는데 급급한 상황이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6월 25일 저녁, 의정부로 가는 길목인 청량리에 도착한 제19연대가 성동역으로 가서 춘천행 열차를 기다리는 중이라는 사실을 육군본부가 파악했다면 임의로 작전지역을 바꾸었을지도 모른다.
가설일 뿐이나 당시 육군본부의 행태를 보면 충분히 가능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만일 그랬다면 예비대의 조력을 받을 수 없었던 제6사단은 춘천과 홍천 방어에 실패했을 것이고 북한군 제2군단은 계획대로 수원까지 신속히 남하해 서부전선 아군의 퇴로를 차단했을 것이다. 이처럼 육군본부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도록 만든 통신 불통은 본의 아니게 개전 초기의 유일무이한 대승에 일조한 셈이 되었다. 한마디로 모르는 것이 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