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동맹을 이끈 사건
1953년 6월 8일, 마침내 휴전협상이 마무리됐다. 곧바로 타결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무려 2년간 줄다리기가 벌어졌던 이유는 양측의 의견 차이가 생각보다 컸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포로 교환 문제가 가장 큰 난제였다. 최초 유엔군 측이 추산하던 아군 포로는 국군 8만 8000여 명과 미군 1만 1500여 명 등 총 10만여 명이었다. 그러나 공산군 측이 우리 측에 통보한 명단은 1만 1559명밖에 되지 않았다.
북한은 병력 보충, 전후 복구 등에 동원하기 위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아군 포로의 송환을 거부했던 것이었다. 반면 유엔군 측은 13만 2474명의 포로 명부를 공산군 측에게 넘긴 상태였다. 당연히 협상이 잘될 리 없었다. 결국 중립국 감시위원회의 심사 하에 포로들이 자유의사에 따라 귀환할지, 남을지 혹은 제3국으로 갈지 선택할 수 있도록 하자는데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조만간 총성이 멈출 것처럼 보였다.
우리 정부는 협정안에 격렬히 반발했다. 타결에만 급급해서 국군 포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이제는 생존 여부가 불확실 정도로 시간이 흘렀지만, 사실 그때 해결하지 못한 국군 포로 문제는 현재도 진행형이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휴전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전략적인 우위도 점하지 못한 상태에서 다시 분단되고 유엔군이 철군한다면 대한민국의 안전이 보장될 수 없다고 본 것이었다.
따라서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체결된 협정이 우리의 요구가 수용되지 않은 상태로 순순히 이행될 수 없음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열흘 후인 6월 18일 0시 여러 포로수용소에서 은밀히 명령을 받은 국군 경비병이 미군의 눈을 피해 2만 7389명의 반공포로를 전격적으로 석방했다. 정부는 오전 6시 공식 담화문을 발표했다. 불안한 휴전을 반대하던 국민들은 우리의 의지를 만천하에 보여줬다고 환호했다.
반면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포로 송환이 매듭지어진 것으로 유유자적하던 북한과 중국은 경악했다. 하지만 휴전 자체를 깨뜨리려 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들도 피곤한 상태였고, 배후에서 회담을 조종한 소련의 의지도 컸다. 누구보다 놀랐던 이는 미국이었다. 협상이 파투 나서 전쟁이 늘어질 가능성 때문에 격렬히 항의했다. 그러나 결국 반공포로석방 결과는 우리 의도대로 흘러갔다.
미국은 로버트슨 국무차관보를 특사로 파견해 휴전이 이루어진 직후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한ㆍ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겠다는 의사를 표하며 우리 정부를 달랬다. 원래 미국은 우리가 줄기차게 요구해 온 상호방위조약에 대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 로턴 콜린스 육군참모총장 등, 모두가 반대했을 만큼 부정적이었다. 결론적으로 반공포로석방은 이를 일거에 뒤엎었고 현재 한ㆍ미동맹의 근간이 됐다.
역사적 사건 뒤의 역사
그런데 반공포로석방의 구체적 실행 내용과 관련해 그동안 막연하게 잘못 알고 있고 무심하게 여기는 부분이 있다. 당시 제1포로수용소로 지정돼 70% 이상의 포로가 항상 집결해 있었을 만큼 규모가 컸고 현재도 유적지화한 거제도수용소에서는 단 한 명의 반공포로석방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곳을 제외한 전국에 산재한 8개 포로수용소에서 작전이 단행됐다.
1951년 2월 설치된 거제도수용소는 규모가 크다 보니 반공포로에 대한 친공포로의 테러가 자행되고, 포로수용소장이 납치 감금되는 사태까지 벌어질 만큼 통제가 되지 않았다. 결국 강제 진압 후 포로 분리가 이루어지면서 친공포로만 남게 되었다. 그래서 작전 개시 전까지 비밀을 유지해야 하는 정부는 이곳을 작전에서 제외했다. 만일 북송을 거부하는 이가 있다면 중립국 감시위원회의 심사를 받는 마지막 길도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치밀하게 준비했어도 반공포로석방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탈출 도중 61명의 고귀한 인명이 자유를 눈앞에 두고 생을 마감했다. 그런데 그 중 무려 47명이 부평에 있던 제10포로수용소에서 한 곳에서 발생했다. 당시 국군 1개 중대가 경비를 위해 파견 나가 있었지만, 부평수용소는 거대한 미군 기지 한가운데 위치해서 여타 수용소와 달리 미군의 감시를 이중, 삼중으로 받던 상태였다.
그래서 탈출 작전을 의논하기 위해 파견 나간 밀사가 국군 경비병과 사전에 접촉할 수 없었고 당연히 포로들에게도 거사와 관련한 지침을 전달하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작전이 단행됐을 때 부평수용소는 행동을 함께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날 정오 확성기 뉴스를 통해서 비로소 거사 사실을 알게 된 포로들은 흥분했다. 즉시 회의가 소집돼 그날 저녁 9시 탈출을 결정하고 국군 경비병들에게 계획을 통보했다.
그러나 조짐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미군은 국군 병력을 전원 철수시키고 경비를 당시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미 해병대로 전면 대체한 뒤 외곽까지 2중 감시망을 구축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대대적인,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무모한 탈출이 시작됐다. 곧바로 저지에 나선 미군의 사격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47명이 사망하고 60명이 부상했는데, 이는 수용된 포로의 10%에 이르는 엄청난 수준이었다.
이처럼 비극의 현장이 된 부평수용소는 이후 미군과 국군이 군사 시설로 계속 사용하다가 1998년 인천시에 반환됐다. 현재는 2019년 반환된 캠프 마켓 부지와 엮어서 토지 오염 정화가 끝난 뒤 박물관을 비롯한 근린 복지 시설로 개발될 예정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여러 건축물을 침략의 증거로 남겨 놓자는 시민 단체의 의견 등이 대두하면서 현재 처리를 놓고 많은 갑론을박이 나오는 중이다.
하지만 그러한 와중에도 아쉽게도 이곳이 많은 반공포로들이 자유를 목전에 두고 죽어간 비극적인 역사의 장소임을 알리려는 노력은 없다. 친공포로들의 해방구 노릇을 하던 거제도수용소는 불행했던 시절을 반추하는 사적지가 됐지만, 막상 자유를 찾아 나선 반공포로들이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 갔던 부평수용소에 대한 역사는 완벽할 만큼 철저하게 잊히고 있는 것이다. 아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