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1일(현지시간) 하와이 마우이 섬 라하이나 지역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로 새까맣게 불에 탄 자동차와 건물 잔해만 남아 있다. AFP=연합뉴스
“그날 (마우이) 카운티가 정말 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집을 희생시켰다고 생각합니다.”
하와이 마우이 섬에서 대형 산불이 발생한 지난 8일(현지시간) 오후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주민 마이크 치치노는 지역 당국의 주먹구구식 화재 대응에 분통을 터뜨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차량 눈앞까지 화염이 다가온 상황에서 재난 정보를 얻기 위해 라디오를 켰지만 원하는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면서 “카운티가 우리를 죽음의 덫에 빠뜨린 것처럼 느껴졌다”고 떠올렸다. 12일로 화재 발생 닷새째. 여전히 재확산 위험은 있지만 큰 불길이 대략 잡혀가면서 화마가 할퀴고 간 참상이 드러나고 있다. 피해가 집중된 마우이 섬 북서쪽 해안 도시 라하이나는 원자폭탄을 맞은 듯 잿더미로 폐허가 된 모습이다.
이날 저녁까지 파악된 사망자는 93명이라고 CNN이 전했다. 리처드 비센 마우이시장은 “지금까지 나온 희생자들은 건물 밖에서 발견됐다”고 했다. 구조물 내부 등 잔해 수색을 본격화하면 피해 규모가 더 커질 수 있다는 뜻이다. 하와이주 당국은 연락이 끊기거나 소재 파악이 안 된 실종자가 약 1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 있다. AP 통신은 1918년 미네소타주 북부 칼턴 카운티 등을 덮친 산불로 수백 명이 숨진 이래 100여 년 만에 최악의 산불로 남게 됐다고 보도했다.

대형 산불로 마을 대부분이 불에 타 버린 미국 하와이주 마우이 섬 라하이나 지역의 11일(현지시간)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화재 면적은 총 2170에이커(약 8.78㎢)로 추산된다. 서울 여의도 면적(약 2.9㎢)의 약 3배가 하루아침에 시커먼 숯 더미가 된 셈이다. 지역 재건에 필요한 비용은 55억2000만 달러(약 7조3500억원)로 추정된다. 최은진 전 마우이 한인회장은 “하와이에서도 지상낙원으로 여겨진 마우이섬이 이렇게 타버려 다들 충격이 크다”며 “인구밀도가 높아지고 기후변화도 컸는데 카운티나 주 정부에서 대비를 못 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산불 초동 단계 부실 대응 논란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주 당국은 진상 조사에 착수했다. 앤 로페즈 하와이주 법무부 장관은 이날 “마우이 섬 산불 전후에 있었던 주요 의사결정과 상시 대비책에 대한 포괄적인 조사를 벌일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현재 구호 활동에 대해 전면적 지원을 이어가고 있으며 이제는 규명 과정에 들어갈 때”라고 했다.
경보 사이렌 왜 안 울렸나
이 때문에 불길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번지고 언제 어느 지역에 전기가 끊겼는지 등 재난 정보가 신속히 공유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마우이 재난관리청 관계자는 이에 대해 “사이렌 자체가 반드시 대피를 의미하진 않으며 대개 추가 정보를 찾으라는 경고를 위해 사용한다”고 했다. 하지만 AP 통신과 NBC 방송 등에 따르면, 지역 주민들은 “당국은 우리에게 아무런 경고를 하지 않았다. 사이렌도 없었고 알람도 없었다”(리사 파니스), “휴대전화에 사이렌이나 재난 경보가 울리지 않았다”(라나 비에라), “사람들이 대피하도록 쓰나미 사이렌을 켤 수도 있었다”(브라이언 사이즈모어) 등 경보 체계가 작동하지 않은 점을 한목소리로 비판하고 있다. 사이렌 소리를 듣지 못한 라하이나 주민들은 화염을 직접 목격하거나 코를 찌르는 연기 냄새를 맡고서야 위험을 인식하게 됐다는 얘기다.
통신·라디오 ‘먹통’도 한몫

지난 11일(현지시간) 하와이 마우이 섬 라하이나 지역에서 발생한 산불로 불에 탄 자동차가 잿더미가 된 주택 앞에 놓여 있다. AFP=연합뉴스
‘산불 위험’ 경고에도 과소평가
월스트리트저널(WSJ)도 “2014년 민간기구 ‘하와이 산불 관리 조직’이 당국에 제시한 산불 방지 계획안은 라하이나가 지형과 기후 특성상 마우이에서 화재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이라고 짚었다”고 전했다. 상대적으로 건조한 기후에 허리케인 강풍까지 더할 경우 대형 화재 위험이 높다는 경고등이 꾸준히 켜졌지만 지역 당국이 산불 대응을 소홀히 했다는 지적이다.

하와이 마우이 섬 지역 주민들이 지난 11일(현지시간) 산불로 타버린 마을 전경을 바라보고 있다. AFP=연합뉴스
한인 인명피해 신고 없지만 재산피해
집을 잃고 대피한 이재민은 4500명으로 집계됐다. 다만 라하이나 주민 1만2702명 중 상당수가 가족이나 친지 등 집에 머무르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이재민 수가 1만명을 넘을 거라는 현지 언론 보도도 나온다. 주민들은 화재 당시 급히 집을 비웠다가 돌아와 삶의 터전이 폐허가 된 모습에 망연자실한 상태다. 설사 집이 온전하더라도 전력 차단에 물 부족 사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마우이 카운티 수도 당국은 “산불로 파이프 수백 개가 손상된 만큼 수돗물이 오염됐을 수 있으니 추후 통보 때까지 물을 끓인 뒤 마시지도 말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대형 산불로 잿더미가 되다시피 한 하와이주 라하이나 지역에서 12일(현지시간) 수색구조대원들이 피해 지역을 걷고 있다. AP=연합뉴스
잿더미서 구조 활동 계속
AP에 따르면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은퇴 소방관 제프 보가르는 35년 지기 친구를 화마에 잃은 슬픔을 애써 삼켰다. 보가르와 그의 친구 프랭클린 트레조스는 산불이 나고 다른 사람들을 구조하다 뒤늦게 현장을 탈출하려 했다. 불길이 점점 더 커지고 가까워지자 더 이상은 위험하다 판단하고 지난 8일 오후 탈출을 시작했다. 두 사람은 각자 차량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보가르의 차가 시동이 걸리지 않았고, 갑자기 차량 문 마저도 열리지 않자 그는 창문을 깨고 나와 땅바닥을 기면서 탈출을 이어갔다. 그러다 경찰 순찰차에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다. 안타깝지만 그의 친구 트레조스는 목숨을 잃었다. 보가르가 다음날 집에 돌아와 보니 친구는 그의 차량 뒷좌석에서 잿 속 한 줌의 뼈로 남아 있었다.

12일(현지시간) 미국 하와이주에서 산불로 인해 라하이나 주민들을 위한 대피소에서 대피소 위치와 이용 가능한 공간이 표시된 전광판을 한 여성이 확인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12일 조쉬 그린 하와이주지사는 "하와이는 물론 미국 역사상 최악의 화재"라며 "우선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구호에 집중해야 한다. 흩어진 가족들을 다시 만나게 해주고 살 집과 건강 진단 등을 해 주는 등 피해지역 재건을 고려하겠다"고 말했다.
도로 끊겨 구호품 전달 늦어져

12일(현지시간)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의 미 해군 기지 내에 라하이나 주민들에게 보낼 음식, 물, 기타 생필품이 쌓여 있다. EPA=연합뉴스
정부의 구호 물품 조달이 늦어지자 하와이 원주민들은 자발적으로 조직을 구성, 재난 지역으로 물품 수송에 나서고 있다. 배를 이용해 발전기, 프로판 가스, 의류, 즉석식품 등 보급품을 싣고 피해 지역에 인접한 카하나 해변에 실어 나르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WP)는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