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하이엔드] 보테가 베네타와 날아 올랐다...강서경의 '버들 북 꾀꼬리’

한국화에서 현실 세계로 튀어나온 듯한 가을의 ‘산’, 세상의 모든 소리를 흡수해버릴 것 같은 커다란 ‘귀’, 화문석과 철재로 만들어진 ‘자리’. 넓은 공간을 가득 채운 설치 작품들은 한국의 자연과 삶의 흔적이 익숙하기도, 낯설기도 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지난 9월 7일 시작한 작가 강서경의 개인전 ‘강서경: 버들 북 꾀꼬리(Suki Seokyeong Kang: Willow Drum Oriole)’다.

보테가 베네타의 후원으로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강서경 작가의 전시 '버들 북 꾀꼬리'. 강 작가가 직접 기획해 만든 '액티베이션'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 보테가 베네타]

보테가 베네타의 후원으로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강서경 작가의 전시 '버들 북 꾀꼬리'. 강 작가가 직접 기획해 만든 '액티베이션'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 보테가 베네타]

이번 전시는 이탈리아 럭셔리 브랜드 보테가 베네타의 후원으로 리움미술관이 기획했다. 준비 기간만 1년 넘게 걸린 전시는 여느 전시에선 보기 힘든 130여 점에 달하는 작품 수와 리움 2개 층을 연결하는 광활한 전시 규모를 자랑한다. 작품은 리움미술관의 M2 전시장과 로비 전체에 설치됐다. 시간의 흐름 가운데 변화하는 자연과 그 속에 함께하는 개인들의 이야기가 거대하지만 섬세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리움미술관 로비에 설치된 강서경 작가의 작품을 배경으로, 퍼포머들이 액티베이션을 선보이고 있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작품이다. [사진 보테가 베네타]

리움미술관 로비에 설치된 강서경 작가의 작품을 배경으로, 퍼포머들이 액티베이션을 선보이고 있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작품이다. [사진 보테가 베네타]

경계 없는 한국 전통의 재해석 

강서경은 다양한 매체와 방식으로 회화의 확장 가능성을 탐구해 온 작가다. 그가 보여주는 작업은 평면, 조각, 설치, 영상, 퍼포먼스 등 경계가 없다. 대학에서 동양화와 한국화를 전공한 그는 전통 회화·음악·무용·건축 등에 대한 폭넓은 관심과 연구를 보여주면서도, 이런 전통을 동시대 예술 언어와 사회문화적 문맥으로 새롭게 재해석해 보여준다. 강서경의 작품엔 매체, 형식, 시대의 구분을 뛰어넘는 조형적·개념적 실험으로 가득 차 있다. 

작가는 활발한 작품 활동으로 국내외 미술계의 주목을 받아 왔다. 룩셈부르크 현대미술관(2019), 필라델피아 현대미술관(2018)에서 개인전을 개최했고, 베니스 비엔날레(2019), 리버풀 비엔날레(2018), 광주비엔날레 (2018·2016) 등에 참여했다. 2013년엔 송은미술대상 우수상을, 2018년엔 아트바젤 발루아즈 예술상을 받기도 했다. "회화란 눈에 보이는 사각형과 보이지 않는 사각 공간을 인지하고, 그 안에 무엇을 채워 넣을지를 고민하는 작업"이라고 말하는 강서경은 그리는 행위의 기본틀인 사각 형태의 프레임을 전통에서 발견한 개념 및 미학과 연계하여 회화라는 매체를 입체적으로 바라보고 확장하는 기제로 활용해왔다.

화문석에서 영감 받아 탄생한 작품 '자리'. [사진 보테가 베네타]

화문석에서 영감 받아 탄생한 작품 '자리'. [사진 보테가 베네타]

강서경 작가의 개인전 '버들 북 꾀꼬리'의 작품들. [사진 보테가 베네타]

강서경 작가의 개인전 '버들 북 꾀꼬리'의 작품들. [사진 보테가 베네타]

강서경 작가의 개인전 '버들 북 꾀꼬리'의 작품들. [사진 보테가 베네타]

강서경 작가의 개인전 '버들 북 꾀꼬리'의 작품들. [사진 보테가 베네타]

 


전통가곡 '버들은'에서 영감 받아

이번 전시의 제목이자 신작 영상의 제목인 '버들 북 꾀꼬리'는 전통 가곡 이수대엽(二數大葉)의 '버들은'을 참조한 것이다. 마치 실을 짜듯 버드나무 사이를 날아다니는 꾀꼬리의 움직임과 소리를 풍경의 직조로 읽어내던 선인들의 비유를 가져왔다. 강서경은 이번 전시에서 관람객들이 시각, 촉각, 청각 그리고 시·공간적 차원의 경험을 할 수 있게 했다. 그는 "이번 전시 '버들 북 꾀꼬리'는 풍경의 개념을 모든 방향에서 확장하고자 하는 시도다. 수천, 수만 마리의 꾀꼬리가 드넓은 산이 펼쳐진 풍경 속을 함께 또 각자 날아다니는 상상을 해보았다"고 전시의 영감을 설명했다. 사람과 사람을 둘러싼 존재와 움직임을 알아차리고, 더불어 관계 맺는 ‘진정한 풍경’에 대해 고민한 결과다.

전시는 마치 한 폭의 풍경화가 3차원으로 펼쳐져 공감각적으로 공명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여기에는 사계를 담은 산, 바닥과 벽으로 펼쳐지는 낮과 밤, 공중에 매달린 커다란 귀, 작지만 풍성한 초원과 제 자리를 맴도는 둥근 유랑, 그리고 각자의 자리를 만들고 전시의 보이지 않는 틀이 되는 다양한 사각이 함께 한다. 관람객은 풍경을 바라보는 것을 넘어 그 사이사이 존재하는 여백의 공간을 직접 거닐어 보며 각자의 움직임과 서사를 더하게 된다. 이렇듯 다양한 작품과 관람객이 함께 모인 전시는 각기 다른 존재들이 연결되고 관계 맺는 풍경으로 제시된다.

이번 전시는 강서경의 최대 규모 미술관 전시다. 여러 형식을 넘나드는 그의 작품세계를 총체적으로 조망할 좋은 기회다. 그가 연작으로 보여줘 왔던 작품 '정井' '모라' '자리'를 포함해, 개인성에 대한 탐구를 보여주는 '그랜드마더타워' '좁은 초원' '둥근 유랑' 등 기존 연작에서 발전된 다양한 작업을 선보인다. 더불어 '산' '귀' '아워스' '기둥' '바닥'처럼 한층 다변화된 형식으로 풀어낸 새로운 조각 설치를 보고 있자면, 한줄기 시원한 산바람이 스쳐 가는 듯 잔잔한 감동을 끌어낸다. 리움미술관의 곽준영 전시기획실장은 "강서경 작가의 이번 전시는 미술관 공간에서 유기적으로 헤쳐 모인 각각의 작품들이 서로 연결되고 상호작용하는 연대의 서사를 펼친다. 작가는 이를 통해 나, 너, 우리가 불균형과 갈등을 끊임없이 조율하며 온전한 서로를 이뤄가는 장(場)을 제시하고자 한다"고 전시를 소개했다.

평소 강서경 작가 작품에 대한 관심을 표현했던 방탄소년단 RM이 전시를 찾아 관람하고 있다. [사진 보테가 베네타]

평소 강서경 작가 작품에 대한 관심을 표현했던 방탄소년단 RM이 전시를 찾아 관람하고 있다. [사진 보테가 베네타]

 

장인정신으로 재해석한 전통이 공통점 

보테가 베네타는 강서경 작업의 공예적 특징과 경계 없는 혁신성에 주목했다. 보테가 베네타의 마티유 블라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우리가 이런 훌륭한 한국의 현대미술 작가를 후원할 수 있게 돼 기쁘고, 매우 영광이다”라며 강 작가의 작품에 경의를 표했다. 보테가 베네타의 앰배서더인 RM도 일찌감치 전시를 방문했다. 평소 몇 차례나 강서경 작가 작품에 대한 관심을 표현했던 RM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전시 사진을 올리고 “한국 문화를 지원해준 보테가 베네타에게도 고맙다”는 글을 남겼다.

지난 9월 5일 진행됐던 전시 오프닝 나이트에서는 강서경이 직접 기획·연출한 퍼포먼스 ‘액티베이션(Activation)’을 처음 공개했다. 작가가 공간적 서사와 사회 속 개인의 영역에 대한 탐구를 시각화해 구상한 일종의 퍼포먼스다. 보테가 베네타의 후원으로 이번 전시와 출품작에 맞춰 재구성됐다. 
많은 설치 작품들 사이로 여러 명의 무용수가 자리 잡고, 마치 바람에 흔들리듯 매우 느리고 유려한 동작으로 몸을 움직이며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조선시대 궁중무용인 '춘앵무'에서 영감 받아 만든 18개의 각기 다른 안무가 동시에 그리고 순차적으로 펼쳐졌다. 퍼포먼스는 이후 '움직임 워크숍'을 마련해, 강서경이 고안한 액티베이션 움직임을 예술 강사에게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할 예정이다. 전시는 올해 12월 31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