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다 필기구 수집가 이상민씨
울산정보산업진흥원의 ICT융합본부장을 맡고 있는 이상민(59)씨는 40여년 동안, 대한민국에서 가장 다양한 종류의 필기구를 수집한 사람이다. 벽면을 채운 것 말고도 대형 여행가방들 안에도 수백 점씩 몸을 붙인 채 햇빛 보기를 기다리고 있다. 도대체 얼마나 될까. 그는 “3000점까지는 셌는데 5년 전부터는 귀찮아서 포기했어요”라고 했다.
수집품의 80%는 ‘샤프’라고 통칭하는 샤프 펜슬이다. “만년필은 워낙 고가품인 데다 기능에 큰 차이가 없어요. 반면 샤프에는 정교한 공학 매커니즘이 담겨 있어서 매력적입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샤프심을 배출하는 방식은 ‘누르기’ ‘흔들기’ ‘돌리기’ ‘꺾기’에다 ‘종이에 대면 자동으로 나오는’ 것까지 13가지나 된다고 한다. 주인장은 각각의 기능을 대표하는 제품들을 일렬로 늘어놓고 작동 원리와 특징을 열띤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의 필기구 사랑은 알고 보니 ‘필기 사랑’이었다.
캐나다 온타리오주, 쓰기 수업 재개
필기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경남 진해에 살던 초등학교 2학년 때 ‘총알처럼 심을 하나씩 밀어내는’ 신개념 샤프를 만화책에서 봤어요. 그걸 문방구에서 구하려고 진해 시내를 거쳐 마산까지 가다가 길을 잃었어요. 그 정도로 필기구에 관심이 많았죠. 글 쓰고 필기하고 정리하는 걸 좋아하다 보니 새 펜을 쓰면 기분 전환이 되고 뭔가 새로운 각오가 생기곤 했어요.”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오셨네요.
“공대 가서 미사일 만드는 게 꿈이었는데 아버지 권유로 문과를 갔어요. 그래도 뭐든 만드는 걸 좋아했고 그러다 보니 샤프의 매커니즘에 매료됐죠. 삼성에스디에스·KT 등 들어간 직장마다 기술기획 업무를 주로 맡았는데, 보고서를 쓰기 위해 수없이 메모를 했고 펜을 더 가까이하게 됐죠. 6년간 일본 주재원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필기구 수집에 나섰습니다.”
나라별 필기구의 특징이 있나요.
“독일은 실용성, 이탈리아는 예술성, 일본은 기능성이 돋보입니다. 독일은 배럴(몸통) 부분을 특수금속으로 도금 처리해 10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게 할 정도입니다. 이탈리아는 고흐의 특정 작품을 연상시키는 색감을 반영한 제품을 만들고, 일본에는 샤프 하나에 0.3㎜, 0.5㎜, 0.7㎜ 심이 모두 나오게 디자인한 제품도 있습니다.”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도 필기구를 만든다면서요.
“까르띠에·던힐에서 샤프를 만듭니다. 30~40만원 정도인데 누르는 감촉이 굉장히 부드럽습니다. 루이비통 샤프는 약 9㎝로 백에 쏙 들어갈 정도의 소형입니다. 까렌다쉬(스위스)는 2011년 세계에서 가장 비싼 펜(약 3억원짜리 만년필)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브랜드인데요. 여기서 만드는 볼펜은 누르는 방식임에도 딱딱 소리가 거의 안 납니다. 이 소리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필기구는 그 나라 문명을 반영한다”고 하셨는데요.
“중국이나 우리는 붓을 썼어요. 근대화 이전까지 필기구는 그것밖에 없었죠. 붓으로는 설계도를 정밀하게 그릴 수 없지만 연필이나 펜으로는 가능하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연필 회사인 파버카스텔(독일)이 창업한 게 1761년입니다. 이 때가 조선 영조 37년인데 참으로 이른 시기의 선구자적 움직임 아닙니까. 이러한 필기구의 차이가 근대 동서양의 과학과 기술수준의 격차를 초래하는 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요. 파버카스텔은 지금도 연필만으로 연 1조원대 매출을 올리는데, 우리는 기술력이 꽤 좋았던 토종 브랜드 ‘마이크로’가 IMF 파고를 넘지 못하고 침몰했죠. 모나미가 분투하고 있지만 쉽지 않습니다.”
필기구 수집하는데 돈이 많이 들었을 것 같은데요.
“승용차 한 대 값? 진짜 3000만원 정도 밖에 안 들었어요. 소장품 중 제일 비싼 게 100만원대 카렌다쉬 아이반호 샤프입니다. 요즘도 주로 당근마켓 통해 일주일에 한두 건 거래를 하는데, 필기구는 투자 개념이 아니라서 가성비가 중요합니다. 스피커도 200만원 넘어가면 음질을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던데 샤프도 5만원 넘어가면 기능이나 품질에는 큰 차이가 없어요. 다만 배럴에 보석을 박거나 섬세하게 조각을 하는 식으로 한정판을 만들어 비싸게 파는 거죠.”
부인한테 크게 욕을 먹지는 않았겠네요.
“돈 쓴다고 욕먹지는 않았지만 왜 그렇게 쓸데없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쓰냐는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15만원짜리 몽블랑 세트 사러 주말에 부산까지 갔다 오기도 했으니까요. 아내는 ‘그럴 열정이 있으면 주말에 가족끼리 외식도 하고 문화 활동도 하면 얼마나 좋으냐’고 하는데 요즘은 초탈한 것 같습니다. 제 방에 처박혀 있는 물건들이 안쓰러웠던지 진열장을 하나 장만해 주기도 했거든요(웃음).”
직거래 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은?
“얼마 전 대학교 2학년생이 희귀한 만년필-볼펜 세트를 너무 싼 값으로 당근마켓에 내놨어요. 만나서 물건을 직접 보니 거의 쓴 적이 없을 정도로 상태가 좋았어요. ‘이걸 왜 팔려고 하냐. 되게 좋은 거니까 팔지 말아라’ 했더니 그 학생이 ‘저희 이제 펜 쓸 일이 없어요’ 하더라고요. 하기야 웬만한 필기는 태블릿에 전자펜으로 하니까요.”
좋은 필기구를 구입하거나 사용했을 때 남다른 기운이나 에너지를 느끼나요.
“당연하죠. 저는 그걸 힐링이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마음이 답답하거나 울적할 때 저는 좋은 필기구를 사는 걸로 풀어요. 여성들이 갖고 싶은 백을 장만하면 이런 기분일까요. 저는 기능이 독창적이고 뛰어난 샤프를 하나 사면 세상을 다 얻은 듯한 기분이 들어요. 그래 봐야 명품 백의 100분의1 가격이잖아요. 그 정도 돈 들여서 그런 느낌을 어디서 찾겠어요. 그러니 저는 남들이 제 취미에 대해 뭐라고 해도 신경 안 씁니다.”
다른 사람이 쓰는 필기구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겠네요.
“그렇죠. 일종의 직업병이죠. 저는 차에도 옷에도 관심 없지만 사람을 만나면 필기구는 뭘 쓰는지 유심히 봅니다. 오래 전에 IT 관련 전문지에서 인터뷰를 하러 기자가 찾아왔어요. 그런데 무슨 보험 대리점에서 판촉용으로 제공한 큼지막한 4색 볼펜으로 제 얘기를 받아 적더라고요. 차라리 모나미153 볼펜이 낫죠(웃음). 저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누가 펜을 쓰고 있으면 실루엣만 봐도 어느 브랜드 어떤 제품인지 단번에 압니다.”
사람들이 손편지를 그리워하고 다시 소환하는 시대가 왔는데요.
“손편지에는 쓴 사람의 감정이나 심리 상태가 그대로 드러나요. 사랑하는 마음을 담으면 따뜻하고, 화가 나 있으면 필체가 거칠어지고, 존경하는 마음이 담기면 글씨가 반듯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이메일이나 카톡 문자에는 그런 표현이 담기지 않죠. 오죽 답답했으면 감정을 전달해주는 이모티콘이 점점 발달하고 심지어 그걸 돈 주고 사겠어요. 그런 식으로라도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글에 담고 싶어하죠.”
“손글씨 좋다” BTS가 한마디 해줬으면
‘미스터 필기구’와의 대화는 결론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것은 ‘손글씨의 위대함’이었다.
‘손은 기억한다’는 명제의 의미는?
“학생 시절 연습장이 까매지도록 수백 번씩 쓰면서 암기한 영어 단어는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손 운동이 뇌의 기억 영역과 가장 강력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이죠. 캐나다 온타리오주는 필기체 쓰기 수업을 17년 만에 재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스웨덴·핀란드·네덜란드 등도 종이교과서를 부활한답니다. 한국은 2025년부터 디지털 교과서를 본격 도입한다죠. IT 업계에서 평생 일한 저로서는 디지털 혁신을 응원하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우리 학생들의 교육현장을 설계할 때는 다른 나라의 움직임도 잘 들여다보고,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균형을 맞추는 게 좋다고 봅니다.”
‘생각을 스케치한다’는 무슨 뜻이죠?
“필기구의 힘은 기억력과 창의력을 보조할 수 있다는 겁니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나 감각을 잡아 둘 수 있는 게 필기입니다. 제가 보고서 쓰기 전에 이런저런 메모를 하고 그림도 그려보고 하는 게 생각을 스케치하는 과정이고, 그걸 통해 아이디어가 정리되는 겁니다. 뇌의 가장 친근한 조력자가 바로 필기구인 셈이죠.”
이 본부장은 “BTS 멤버 한 명이 ‘여러분, 손글씨는 정말 좋은 겁니다. 앞으로 저한테 손편지 많이 보내주세요’ 한마디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요”라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