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지붕 두 가족
영화 ‘서울의 봄’은 지난해 한국 영화 최고 흥행작이다. 평론가나 관객들로부터 호평을 받은 것과 별개로 많은 당사자가 여전히 생존하고 있을 만큼 비교적 최근이라 할 수 있는 1979년에 벌어진 ‘12.12 군사반란’을 극화한 것이어서 사회적으로도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래서 과거의 기억을 되새기려는 이들뿐만 아니라 아픈 현대사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들도 극장을 많이 찾았다.
이런 이유로 극에 대한 관객의 몰입도가 상당히 높아 주요 장면에서는 안타까움, 탄식, 분노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진압에 나선 육군본부가 반란군의 거짓말에 속아 서울 진입을 목전에 두었던 제9공수특전여단(이하 9공수, 극중 8공수)에게 회군 명령을 내린 장면도 관객들의 아쉬움을 불러왔다. 반란군을 제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기에 발을 동동 굴렀다는 후기도 있을 정도다.
실제로 9공수의 회군은 대단히 중요했던 전환점이었다. 역사에 만약은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9공수가 서울에 진입했다면 30경비단에 모여있던 반란군 지휘부를 제압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기 때문이다. 9공수가 회군한 사이 반란군 소속 1공수가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며 진압군을 무력화한 사실을 반추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주장이다. 당시 노태우 소장이 자살까지 고민했을 정도로 9공수 출동은 반란군에게 엄청난 위기였다.
반면 출동한 9공수가 1개 대대에 불과해 반란군 제압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커다란 저항을 받지 않았던 1공수와 달리 9공수가 반란군 지휘부를 제압하려면 우선 청와대를 경비하는 최정예 부대지만, 어이없게 반란군이 돼 버린 30경비단ㆍ33경비단과 싸워야 했다. 설령 여기서 이겨도 곧바로 진입할 반란군의 1, 3, 5공수와 제9사단과의 대결은 어려웠을 것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이처럼 9공수의 회군은 두고두고 아쉬움과 논쟁거리를 남긴 채 역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흘러갔다. 그런데 9공수의 출동부터 회군까지의 동선을 살펴보면 반란에 가담한 5공수(현 국제평화지원단)와 상당 부분이 겹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당시에 두 부대의 주둔지가 인접한 데다 서울 시내로 신속히 진입할 수 있는 길도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12ㆍ12 군사반란에 등장하는 육군특수전사령부(이하 특전사령부) 예하 부대는 진압에 나선 9공수와 반란에 가담한 1, 3, 5공수 등 수도권 4개 여단이다. 현재는 3개 부대가 주둔지를 옮겼는데, 1979년 당시에는 1, 3공수가 서울에, 5, 9공수가 인천에 배치돼 있었다. 그런데 1, 3공수는 서울이라도 동서로 양극이라 할 수 있는 외발산동과 거여동에 있었던 반면 5, 9공수는 인천의 부평구(당시 북구) 산곡동에 함께 주둔하고 있었다.
1971년 미 7사단의 철군으로 주한미군의 대대적인 감군과 재배치가 이루어지면서 ASCOM이라고 불린 부평의 미군 기지 일부가 반환되자 많은 국군 부대가 들어서게 됐다. 이때 5공수가 산곡동으로 이전해 왔고, 9공수는 1974년에 그곳에서 창설됐다. 대개 신편 부대는 기존 부대로부터 분리돼 창설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정황상 9공수는 창설 당시에 5공수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을 것임은 틀림없다.
이들은 12ㆍ12 군사반란 직후인 1980년대 초 각각 다른 곳으로 옮겨갔고 미군 시설도 지난해 12월 완전 폐쇄됐으나, 여전히 많은 국군 부대가 일대에 주둔하고 있다. 여담으로 부평구는 특전부대의 요람과 같은 곳이다. 일단 특전사령부의 창설지가 부평구 구산동이고, 항상 특전사령부와 함께 하는 3공수의 창설지도 구산동과 접해 있는 부개동이다. 특수전학교는 부평구 바로 옆이라 할 수 경기도 부천시 고강동에서 창설됐다.
그렇게 산곡동에 둥지를 틀었을 당시 5, 9공수는 정문 사이 거리가 지하철 두 정거장 정도였지만, 반대쪽은 상대 훈련 모습을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웠다. 44년째 영업 중인 노포 중국집의 위치가 주둔 당시 양측 사이였기에 5, 9공수 장병이 섞여서 식사하는 모습이 일상이었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철조망으로 부대를 나누었을 뿐이지, 한 지붕 두 가족과 다름없었다. 부대의 성격상 수시로 협조와 교류가 있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부대의 명예는 사람이 만든다
12ㆍ12 군사반란은 그처럼 밀접했던 두 부대의 운명을 바꿨다. 1979년 12월 12일 오후 9시 50분쯤 정병주 특전사령관이 9공수에게 출동을 명령했다. 하지만 당시 9공수는 대부분 서산으로 훈련 나간 상태여서 단지 1개 대대만 동원이 가능했고 설상가상으로 차량도 없었다. 이에 육군본부는 근처 일신동에 위치한 제3군수지원사령부에 배차를 지시했다. 그렇게 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윤흥기 여단장은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옆에서 동고동락하고 있던 5공수가 순식간 적이 돼 버린 것이었다. 거의 동시에 5공수 지휘부도 9공수가 진압군이 됐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물론 양측 모두 여단장을 비롯한 극히 일부의 지휘관만 이런 황당한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 육군본부나 30경비단에 모인 반란군 지휘부 모두 서울의 상황에만 신경 써서 그런 것인지 몰라도 부평 현지에서 상대를 제압하라는 명령은 내리지 않았다.
국기를 흔든 반란이라는 요소를 제외하고 단지 군사적으로만 보자면 이는 반란군의 작전 능력이 떨어졌다는 의미다. 자정 무렵 판세는 9공수와 반란군의 1공수 중 누가 먼저 서울 도심으로 진입하냐가 중요한 시점이었다. 그렇다면 바로 옆에 있는 5공수로 하여금 현지에서 9공수의 출동을 저지시켜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반면 진압군은 9공수가 당장 동원할 수 있는 유일한 전력이어서 5공수와의 교전을 최대한 피해야 했다.
결국 9공수는 5공수의 방해를 받지 않고 12월 13일 밤 12시 5분에 출동했다. 통행금지 직후여서 신속히 부평대로와 경인고속도로를 거쳐 이동했다. 같은 시각에 반란군은 5공수에 출동 지시를 내림과 동시에 신월동에서 대기하고 있던 1공수가 도심 진입을 시도했다. 그때까지는 진압군이 서울 시내 한강 교량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9공수가 행주대교로 우회하고 있던 1공수보다 유리해 보였다.
하지만 영화를 보던 관객들이 탄식한 것처럼 육군본부의 명령에 따라 9공수는 12시 20분 부천 IC에서 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9공수가 원대복귀 했을 무렵인 오전 2시에 5공수가 서울로 출발했다. 다시 말해 회군한 9공수 병력이 차에서 내리고 있을 때 담 너머 5공수 연병장에서는 병력을 실은 차들이 서울로 떠난 것이었다. 5공수도 9공수가 지나간 부평대로와 경인고속도로를 이용해 서울로 갔다.
당시에 인천과 서울을 연결하는 도로는 경인고속도로 외에 6번 국도, 46번 국도(경인로)가 있었다. 그런데 국도는 상당 구간이 편도 1차선인 데다 포장 상태도 지금의 시골 지방도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더구나 6번 국도는 서울 시내로 곧바로 연결되지 않았고 ,46번 국도는 부천, 영등포 시가지를 통과하므로 신속히 이동하기 어려웠다. 결국 5, 9공수 모두 부평대로와 경인고속도로의 이용은 필연이었다.
만일 두 부대의 출동 시간이 같았다면 아이러니하게도 함께 이동할 수도 있었다. 아니면 9공수의 회군이 늦었거나 5공수의 출동이 빨랐다면 부평대로나 경인고속도로에서 마주칠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먼 산 바라보듯 그냥 지나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9공수의 윤흥기 준장이나 5공수의 장기오 준장 모두 자신들의 임무를 알고 있었기에 부평 시가지나 경인고속도로가 비극의 현장이 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런 점에서 장병 입장에서는 두 부대가 마주치지 않았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부대를 사적으로 동원한 이들이 비난을 받아야지, 아무것도 모르고 출동한 장병에게까지 반란의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 군대의 특성상 장병들은 지휘관의 명령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당시 여건상 실제 전투를 벌여야 할 대다수는 부대 밖의 긴박한 상황을 전혀 몰랐다.
윤흥기 여단장의 전임이 노태우였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결국 부대의 명예는 사람이 결정한다고 할 수 있다. 만일 노태우가 여단장이었을 때 반란이 벌어졌다면 9공수도 1, 3, 5공수 못지않게 적극적으로 가담했을 것이다. 여담으로 이후 9공수는 5ㆍ18 민주화운동 당시에 동원되지 않아 부대사에 치욕적인 오점을 남기지 않았다. 국군 역사 오욕의 시기에 그나마 명예를 지켜낸 부대가 있어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