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계속돼야 하는 이유
지난 22일 오후 10시에 러시아 모스크바 외곽에 있는 공연장에서 100명 이상이 살해되는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테러범들이 관객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을 난사하는 장면은 전 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줬다. 다음날 이슬람 수니파 무장 정파인 IS는 러시아가 체첸 전쟁, 시리아 내전 등에서 이슬람 세력을 탄압했기에 이에 복수하고자 벌인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미국이 사전에 테러 징후를 파악하고 러시아에 주의를 촉구시켰던 사실도 알려졌다.
반면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테러범들의 도주 방향을 근거로 우크라이나가 사건의 배후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한술 더 떠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국장은 미국ㆍ영국도 배후라고 언급했다. 현재 러시아ㆍ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피로감을 느끼는 러시아인이 많다. 2년 전 침략에 나섰을 때 수백 년 전 과거사까지 들먹이며 당위성을 강조했을 정도였으니 전쟁을 계속하려면 서방에 대한 적대감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때문에 푸틴 대통령이 이번 사건을 어떻게든 이용할 것은 분명하다.
이번 사건에 대한 국내 반응도 다양하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소원해진 한ㆍ러 관계와는 별개로 일단 무고한 시민을 상대로 한 테러는 범죄행위라는 의견이 대다수다. 한편으로는 러시아가 침략자이고 무고한 우크라이나인이 죽어가고 있는 작금의 현실을 고려하면 굳이 동정하고 싶지 않다는 내용도 많다. 마치 뽑아도 다시 나는 잡초 같은 IS의 끈질김과 잔인함에 무서움을 느낀다는 이들도 있다.
그러면서 테러와는 별개로 전쟁 중에 한가하게 콘서트냐며 러시아인들의 안일함을 꼬집는 의견도 많이 보인다. 아무리 러시아가 전략적으로 우세한 상황이지만, 연일 전선에서 많은 젊은이가 죽어가고 있는데 후방에서 느긋하게 취미 생활을 즐기는 모습이 이해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커다란 변고가 닥치면 하던 행사도 중단하는 우리나라의 경우를 반추하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주장이다.
그런데 전쟁 중이어도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이러한 문화 활동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먼저 전쟁을 시작하는 이들은 당연하지만, 침략을 당해 어려움을 겪는 나라도 어떻게든 일상을 유지하려 든다. 특히 전쟁이 장기화했을 때 더욱 그렇다. 무엇보다 전쟁을 수행하려면 꾸준히 국력이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전시 체제로 바뀌면 징발ㆍ배급처럼 제약이 많아지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래도 최대한 일상을 유지하며 생산과 소비가 규칙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장거리 타격 수단이 등장한 이후부터 후방도 안전지대가 아니나 그래도 전선보다는 여건이 좋다. 더구나 러시아는 말할 것도 없지만, 우크라이나도 영토가 큰 나라여서 전ㆍ후방의 상황이 상당히 다르다. 따라서 원활하지 않더라도 경제 활동이 꾸준히 이루어지는 중인데 저가의 우크라이나산 곡물 때문에 일부 유럽연합(EU) 회원국이 반발이 있을 정도다.
또한 일상의 유지는 심리적 측면에서도 상당히 중요하다. 일단 국민이 불안을 많이 느낀다면 전선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독일은 전세가 역전된 1943년까지 총력전을 선포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지난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연합군의 봉쇄로 극심한 물자 부족에 시달렸고, 이로 인해 후방의 일상이 흔들리면서 결국 항복에 이르렀던 쓰라린 경험 때문이었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했을 때 전쟁의 여파가 후방까지 밀려오지 않도록 신경 썼다. 초반에 연이은 대승을 거둔 데다 꾸준한 선전ㆍ선동이 더해지면서 국민의 사기가 높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점령지에서 자행된 대대적인 수탈 덕분에 전쟁 후반에 본토가 폭격을 받기 전까지 그럭저럭 사회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이처럼 전쟁 중 일상의 유지는 전선에서의 싸움 못지않게 중요하다.
인간이기 때문에
물론 전쟁 이전의 수준과 같을 수는 없겠지만, 일상을 유지하려면 가장 먼저 의식주가 해결돼야 한다. 그렇게 안정된다면 여기에 더해 또 다른 인간의 욕구를 충족해주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서 전쟁 중이라도 각종 공연이나 스포츠 활동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오히려 일부러 이런 활동을 활성화함으로써 전쟁으로 인한 고통을 조금이라도 상쇄하려 든다. 다음은 그러했던 대표적 사례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제국관현악단(현 베를린 필)은 폭격으로 공연장이 사라지는 가운데서도 1945년 4월 베를린 전투 직전까지 공연을 이어갔다. 나치의 관제 행사에 동원되기도 했지만, 1942년에서 1944년 사이에 마그네토폰으로 녹음된 실황 공연 음원은 소련의 주요 압수 품목이었을 만큼 귀한 대접을 받았다. 냉전이 종식한 뒤 디지털 음원으로 출시돼 전 세계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다.
축구의 나라답게 경기도 끊이지 않고 열렸다. 현재 세계 최고의 리그 중 하나인 분데스리가의 전신이 독일축구선수권대회인데, 1945년에 항복 직전까지도 경기가 벌어졌다. 1942년 9월 20일 베를린에서 열린 스웨덴과의 국가 대항전에 무려 10만의 관중이 몰리기도 했을 정도였다. 당시는 스탈린그라드 도심에서 벌어지고 있던 혈전이 절정을 향해 치달으면서 연일 엄청난 희생자가 발생하던 시점이었다.
1941년 10월 20일, 소련의 레닌그라드 라디오 교향악단은 연주회장 인근에 폭탄이 떨어지는 가운데서도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을 연주했다. 당시 레닌그라드는 독일군에 포위된 직후여서 앞날을 알 수 없는 상태였다. 레닌그라드를 봉쇄해 항복을 받아내려는 독일군의 전략 때문에 식량이 떨어진 도시 안에서 시신에도 손을 대는 비극적인 사건마저 벌어지던 상황이었지만, 많은 시민이 위로를 받고자 공연장을 찾았다.
포위당한 지 1년이 된 1942년 8월 9일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의 초연이 열렸다. 수많은 시민이 공연장을 찾자 시내 곳곳에 스피커를 설치하고 좀 더 많은 이들이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조처했다. 전선도 마찬가지여서 소련군 진영은 물론 대치 중이던 독일군을 향해서도 공연을 중계했다. 포연이 멈추지 않던 레닌그라드가 음악의 바다에 빠진 것이었다. 절망적이던 도시는 그렇게 900일을 견뎌냈다.
6ㆍ25전쟁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연예인은 군부대 위문 행사를 다녔으며, 시민을 상대로 극장이나 가설무대 공연을 펼쳤다. 창작과 소비 활동도 꾸준히 이어져 서울탈환 직후에 발매된 ‘전우야 잘 자라’는 북진의 감격 때문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전선이 고착한 1951년 이후 발매된 ‘굳세어라 금순아’‘전선야곡’같은 곡들은 당시의 시대상을 정확하게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이번 테러 사건이 벌어진 공연의 출연자나 관객 대부분이 설령 침략 전쟁을 옹호하는 이들이라고 해도 콘서트 자체가 결코 비난받을 행위는 아닌 것이다. 현재 전선의 상황이 좋지 않음에도 우크라이나 젊은이들이 유튜브에 K팝 커버 영상을 올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오히려 문화적 갈증을 해소하고 해외에 우크라이나에 대한 도움을 요청하는 메시지도 함께 전하므로 일석이조라고 할 수 있다.
전시에도 일상은 이어져야 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언뜻 이해할 수 없는 전쟁 중 공연 활동도 그런 측면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전쟁 없이 안심하고 살아가는 것이 더 좋다. 마치 단전됐을 때 전기의 고마움을 느끼는 것처럼 전쟁 중에는 오히려 일상을 유지하는 것이 지겹기도 했던 과거가 더욱 그리워질 수밖에 없다. 현재 전쟁이 벌어지는 모든 곳에 하루빨리 그런 시절이 다시 왔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