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민족으로 이루어진 제국의 고민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이던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인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하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가 비밀 결사조직원인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총탄에 암살됐다. 오스트리아는 사건의 배후로 지목한 세르비아에게 책임을 추궁하고 요구사항을 수락하지 않으면 무력을 동원해서 응징하겠다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러시아의 비호를 믿고 세르비아가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자, 오스트리아는 7월 28일 침공을 개시했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유럽 역사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전쟁의 발발 모습이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를 돕겠다며 주변국들이 앞다퉈 참전하면서 전쟁의 판이 급속도로 커졌다. 이후 4년간 유럽을 피바다로 만들고 세계사를 엄청나게 바꿔버린 이 전쟁이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다.
그런데 제일 먼저 전쟁을 시작한 오스트리아의 상황은 상당히 복잡했다. 개전 명분이 충분했어도 정작 국력이 쇠퇴한 상태여서 전쟁을 벌일 여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오스트리아는 지난 500여 년 동안 유럽의 패권을 놓고 주변 열강들과 치열하게 경쟁하던 전통의 강국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부터 서서히 국력이 기울더니 20세기가 되자 찬란했던 과거의 위상은 사라진 상태였다. 당연히 군비도 부족한 점이 많았다.
동원령을 하달하면 15만의 병력은 신속히 300만으로 증강할 수 있으나, 무기나 장비는 조달하는데 시간과 비용이 많이 필요해서 전력을 단기간에 충실히 갖추기 어려웠다. 경제 문제로 20세기 들어 집행한 국방비가 당시 제일 주적이라 할 수 있는 러시아의 25% 수준에 불과했을 정도였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동원된 병력이 과연 잘 싸워줄 것인지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곳곳에서 독립이나 자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을 만큼 오스트리아는 다양한 민족들로 구성된 제국이기 때문이었다. 오스트리아는 전쟁보다 결혼이나 상속을 통해 제국을 키워왔는데, 과거에 피지배인들은 누가 지배자가 되어도 처지가 바뀌지 않았기에 오스트리아에 순종하며 살아왔다. 그러다가 나폴레옹 전쟁 이후 민족주의와 국민국가가 대세가 되자 상황이 바뀌었다.
특히 인근의 그리스ㆍ세르비아ㆍ불가리아ㆍ루마니아처럼 오랫동안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민족들의 연쇄 독립은 커다란 자극제가 됐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1867년 제국 내 두 번째 다수 민족이자 가장 극렬하게 저항하던 헝가리에게 자신들과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며 이중제국을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여기서 소외된 민족들의 저항은 갈수록 커졌고 결국 처음 언급처럼 암살 사건까지 벌어지기에 이르렀다.
전쟁의 시작 및 총동원령 선포와 관련해서 공표된 포고문이 15개 언어로 작성됐을 정도였다. 제국의 신민 중 오스트리아인ㆍ헝가리인이 45%에 불과했으니 과연 동원된 여타 민족 출신 병력이 제국에 충성을 다할지는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전쟁 중 총부리를 오스트리아를 향해 돌려서 싸웠고, 전후 독립한 체코슬로바키아군의 모태가 되었던 유명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같은 사례도 있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하면서도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리저리 전쟁에 내몰려 고통을 겪었던 이들도 있다. 대대로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국경 일대에 살던 이탈리아계 오스트리아인이 그런 풍파를 겪었던 주인공이다. 이들의 고난은 역설적으로 이탈리아의 통일과 관계가 있다. 통상적으로 1870년 로마 입성을 끝으로 이탈리아가 통일된 것으로 보지만, 당시 통일 주도 세력들은 여전히 미완이라고 생각했다.
오로지 이용만 당하다
이들은 이탈리아어가 통용되는 주변 문화권까지 병합해야 완전한 통일이라고 보았다. 오스트리아가 지배하는 티롤ㆍ트리에스테 등이 대표적이었다. 그런데 해당 지역 주민 대부분은 이탈리아에 호의적이기는 했으나, 700년 동안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아왔기에 제국의 일원이라는 생각 또한 강했다. 그래서 1914년에 오스트리아가 총동원령을 발동했을 때 이곳 주민 대부분이 순순히 징병에 응했다.
그러다가 이듬해 5월 중립을 유지하던 이탈리아가 전후 해당 지역을 할양해 주겠다는 연합국측의 요구를 수용하고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상황이 바뀌었다. 순식간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국경 일대가 전쟁터가 됐는데, 흔히 이 둘의 충돌을 이탈리아 전선 혹은 알프스 전선이라고 부른다. 마치 제1차 세계대전의 외전처럼 여겨지지만, 양측 합쳐 100만 명의 전사자를 포함해 300만 명의 인명 피해가 나왔을 만큼 참혹했다.
이처럼 전쟁이 격렬해지자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에 살던 이탈리아계 주민들에게 함께 싸우자고 설득했다. 이에 오스트리아는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이탈리아계 병력을 북부의 갈리치아 전선으로 보내 러시아와 싸우도록 했다. 당연히 많은 장병이 전사상당하고 일부는 포로가 됐다. 그러자 당장 한 명의 병사도 아쉬웠던 이탈리아는 러시아에 이들이 자국민이므로 송환해 달라고 요청했다.
러시아가 요구에 응했지만, 현실적으로 동맹국 측 점령지를 가로질러 이들을 보낼 방법이 없었다. 이에 중국 톈진(天津)의 이탈리아 조계지로 보내면 이탈리아가 알아서 송환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총 4357명의 이탈리아계 오스트리아군 포로가 지구 반대편 중국으로 보내졌고, 톈진에 거주하던 이탈리아인들은 마치 귀순 용사처럼 환대했다. 그러나 정작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또 다른 전쟁이었다.
포로들이 톈진에 도착할 무렵 러시아 혁명 이후 들어선 볼셰비키 정부가 동맹국과 단독 강화하며 전선에서 빠져나왔다. 그러자 연합국은 소련의 이탈을 막기 위해 적백내전에 간섭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동아시아에서도 일본군을 주축으로 하는 다국적군이 결성됐는데, 이탈리아는 톈진에 온 이탈리아계 오스트리아군 포로를 주축으로 부대를 편성해 파병했다. 그렇게 이들은 다시 연해주ㆍ시베리아 일대에서 볼셰비키와 싸워야 했다.
결국 이탈리아계 오스트리아군 포로들은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1년이 지난 1919년 8월 9일까지 순전히 타의에 의해 계속 전쟁터에 머물러야 했다. 이들은 이탈리아가 적백내전에서 발을 뺀 뒤 순차적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 출신에다가 이탈리아 본토에서 먼 곳에 있다 보니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에 관심을 끊으면서 이들의 행적이나 손실에 대해 기록된 것이 그다지 많지 않다.
살아남은 이들은 천신만고 귀국하자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고향이 오스트리아 땅에서 이탈리아 땅으로 바뀌어 있었다. 싫든 좋든 이것 또한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변화였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양측 모두 이탈리아계 오스트리아 주민의 의사를 철저히 무시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전시라고 해도 당사자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오로지 편의대로만 이들을 이용했을 뿐이었다.
오스트리아는 자치권 요구는 외면하다가 막상 위기가 닥치자 제국의 신민이라는 이유로 전쟁터로 끌고 갔다. 이탈리아도 이들을 동아시아의 전쟁터로 내몰았으면서도 제대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전쟁은 모두를 힘들게 만들지만, 이탈리아계 오스트리아인들에게는 대륙을 오가며 전쟁터에 떨궈졌던 당시는 일말의 의의도 찾기 어려웠던 악몽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경계인의 삶을 살던 이들의 비극이었다.